"미국 남북전쟁 발발과 유럽외교" 유럽외교사

사전에 따르면, 남북 전쟁 (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 줄여서 Civil War)은 미국에서 일어난 내전이다.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한 뒤, 아메리카 남부 연합군(이하 '남군')이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찰스턴 항의 섬터 요새를 포격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남북전쟁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은 어떤 것이었을까?


전쟁 발발 당시, 아메리카 남부 연합 지도자들은 내부 방어 거점에서 싸우는 남부군이 방어에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은 또한 전쟁 발발의 경우, 영국과 프랑스가 남부를 위해서, 개입하거나 혹은 중재에 나설 것이라 확신했다. 영불의 직물산업이 남부의 면화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영불이 개입한다면, 전쟁의 판도에 영향을 줄 수 있고, 만약 전쟁의 초기단계에 개입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정적인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북부군은 아직 경험이 없었고, 북부 산업이 아직도 전쟁물자 생산을 위해 총동원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영불연합 함대는 남부 항구에 대한 북부의 봉쇄를 풀 수 있었고, 심지어 유럽 군대가 미국 내전에 직접개입하지 않아도, 남부군에 대한 유럽 물자 지원은 남부가 초기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데 도움을 줄 수 있었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유럽 열강이 북부편에 가담해 개입하거나, 연방의 부활이라는, 북부의 전쟁목표 달성을 위해 중재에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반대로, 만약 영국과 프랑스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남부를 위해서 였을 것이다. 뿐만아니라 영불의 중재가 남부에 유리했던 것은, 중재 노력은 남부의 독립 승인과 관련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남북전쟁 외교전의 핵심은 과연 북부가 유럽 열강이 미국 국내문제에 개입하지 않도록 설득할 수 있는가, 혹은 과연 남부가 유럽 열강의 중재 내지 개입을 성사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있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내전에 개입할 수 있는 유일한 유럽 강대국들이었던 것은 양국만이 북부의 해상 봉쇄를 돌파할 수 있는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양국만이 남부를 지원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산업적 재정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만 프랑스의 개입은 영국의 입장에 달려있었고, 왜냐하면 나폴레옹3세가 개입이 효율적이고, 안전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승인과 협력이 필수적이라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전체 외교전의 열쇠를 가진 것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남부를 위해 개입해야만 하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남부의 독립은 미국이라는 점점 위험해지는 무역,해상 경쟁국을 약화시킬 것이 분명했고, 유럽에서의 판도과 유사한 세력균형을 북미대륙에서 확립시킬 것이 확실했다. 이같은 세력균형은 캐나다의 안보를 강화시킬 것이었다. 왜냐하면, 북부가 영국과 남부 동맹의 위협 때문에, 캐나다를 위협하는 것이 어려워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남부는 영국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얻게 되고, 이를 통해 북미 대륙에서의 영국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상승할 것이란 전망이었다.

미국에 대한 영국의 개입가능성이 높았던 것은 1861년 남북전쟁 발발 당시, 영국 대외정책을 담당했던 정치인들의 특성 때문이었다. 당시 파머스턴 경이 총리였고, 그는 세계 각자에서의 영국 이익의 옹호자로서 명성이 자자했다. 그의 외무장관은 존 러셀 John Russell 경이었고, 그도 총리에 버금가는 영국 이익의 옹호자였다.


당시의 영국 정부 기록은 파머스턴과 러셀이 남부의 독립이 영국에게 잠재적인 이익이 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영국이 바로 직전에 치렀던 전쟁, 즉 크림 전쟁이라는 않좋은 기억 때문에, 두 정치인은 과감한 외교적 모험의 위험성을 크게 절감하고 있었다. 뿐만아니라, 영국의 이해는 미국에서 뿐만아니라 가까운 유럽, 즉 이탈리아,폴란드,덴마크 등지에서 위협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고, 따라서 이같은 국제적 상황을 고려해서, 파머스턴과 러셀은 정책 우선 순위를 결정하게 되었고, 미국에서의 자제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따라서 미국 내전에 대한 파머스턴 외교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신중한 것이 되었다. 뿐만아니라, 영국외교는 미국 남북전쟁에 대한 국내여론도 고려해야 했다. 대체로, 영국 귀족은 남부를 동정했고, 노동계급은 더 민주적인 북부를 지지했지만, 두 계급은 한가지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이 유사했다 : 영국이 다시한번 해외에서의 미심쩍은 군사적 모험에 개입해서는 안되고, 특히 다시는 크림 전쟁 같은 사건은 없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이같은 여론의 압력이 영국외교의 신중 정책으로 귀결되었다.  

참고- Norman Rich, Great Power Diplomacy: 1814-1914, McGraw-Hill Companies,1991, 149-151쪽




덧글

  • 맹꽁이서당 2012/03/16 17:06 # 답글

    비인간적인 노예제도 때문에 남부 지지를 철회한게 아니었군요. 안그래도 평소 의문을 가지고 있었는데, 잘 읽었습니다 ^^
  • 파리13구 2012/03/16 17:10 #

    네, 영국관점에서, 노예제도라기 보다는, 북미대륙에서의 영국의 지정학적 이해가 주요 관심사였다고 합니다. 즉 영국에 유리한 세력 균형의 재편입니다.
  • 동쪽나무 2012/03/16 22:57 # 삭제 답글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북부의 해상봉쇄가 시행돼자 영국에서 "면기근"이라는 실업
    사태가 벌어지고 면직업종사자44만명과 관련산업과 그 가족등 백수십만명이 기아
    선상에 서고 폭동과 전쟁개입을 요구하는 시위가 들끓어습니다. 하지만 영국 정계는
    쉽사리 개입을 할수 없어지요 전쟁개입은 북부의 밀공급 중단을 의미했고 면기근과는
    비교할수 없는 진짜 기근이 닥칠것이기 때문이니까요
    이때 인도와 이집트가 미국면의 대체 공급선이 되지만(미국 공급량의 절반정도)
    미국밀의 대체 공급선이 러시아가 연방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남부편을
    들수가 없었습니다

  • 라라 2012/03/17 01:43 #

    1.식량의 무기화가 19세기 중반에 이미 있었군요,,,,

    2. 러시아가 왜 연방정부를 지지했는지요?

    3 프랑스<영국<미국 북부지역 밀<러시아....

    핵심이 러시아군요.
  • 파리13구 2012/03/17 11:13 #

    동쪽나무 님//

    감사합니다. ^^
  • 동쪽나무 2012/03/17 11:54 # 삭제 답글

    라라 님//
    2.
    19세기 중반이후 러시아의 팽창 정책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심기를 자극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팽창으로 자국내 슬라브인들의 동요를 우려하였고
    영국은 러시아의 중아아시아 접수와 아프칸 진출을 인도지배에 대한 명백한 도전
    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리고 빈체재 해체를 모색하던 프랑스는 적극적으로 반러
    여론을 부채질하고요 결국 크림 전쟁후 러시아는 자신이 유럽의 왕따임을 절감하고
    미국에 접근을 시작했습니다
    1,3,
    19세기 중반이후 유럽에서 식량자급이 가능한 나라가 하나씩 사라집니다(프랑스 빼고)
    특히 영국이 심한데 산업화와 인클러저현상으로 소농의 몰락과 토지의 개인집중
    도시로의 이농과 급격한 인구증가 벌어집니다 타 유럽국가들도 시기의 차이뿐
    똑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프랑스 빼고) 특히 소수 지주에게 집중된 농지는
    밀대신 수익성 높은 목양, 낙농과 과수에 집중하면서 식량의 해외 의존도는 더욱
    높아집니다(프랑스 빼고) 그리고 미국과 러시아의 곡물 수출은 이 시기 부터 급격히
    증가합니다 특히 증기선과 기차의 역활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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