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엔비엔푸 전투와 아이젠하워" (1) 유럽외교사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미국외교


사전에 따르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이란 1946년 12월 19일부터 1954년 8월 1일 디엔비엔푸 요새 전투까지, 프랑스와 친(親)공산주의 성향의 민족주의 단체인 베트민(Viet minh)간의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 대한 미국외교의 입장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우선 전쟁 발발이전에, 인도차이나에 대한 루스벨트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제2차세계대전 동안의 미국의 반식민주의 정서는 인도차이나에서 특히 강렬했다. 루스벨트는 드골을 싫어했고,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그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한 이후 드골의 조국을 크게 존중하지 않았다. 전쟁 동안, 루스벨트는 인도차이나에서 유엔의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방안을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그는 얄타회담에서부터 이 방안에 대해 침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신탁통치안은 트루먼 정부에 의해 폐기되었고, 트루먼은 대서양 동맹의 결성에서 프랑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렇게 했다.


1950년경, 트루먼 정부는 자유세계의 안보를 위해 인도차이나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아귀에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결심했다. 이는 사실상, 미국의 반식민주의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의 싸움을 지원한다는 결정에 다름아니었다.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국무장관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왜냐하면, 미군 합동참모본부가 미군은 나토와 한국에 대한 방위공약을 동시에 지켜야만 하기 때문에, 인도차이나 방위를 위한 여력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심지어,인도차이나에 대한 중공의 침공 경우에도 그렇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인도차이나에서의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위해서, 미국은 프랑스군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인도차이나 공산주의자와 싸우고 있는 프랑스에게 미국은 재정 및 군수 지원을 했다. 이후 미국은 프랑스에게 인도차이나 독립을 압박하면서, 반공전략과 반식민주의 원칙간의 모순을 해소할 예정이었다.


딘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국외교의 고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한편으로, 만약 프랑스의 시대착오적인 식민주의적 태도를 계속해서 지지한다면, 미국은 골탕을 먹게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 문제로 프랑스를 너무 심하게 압박한다면, 프랑스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면서, 인도차이나로부터 물러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 "그래 좋아, 전부다 너희가 가져라. 우리는 이제 필요없어!"

이에 대한 애치슨의 해법은 미국외교의 모순을 반복하는 것이었다 :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늘리면서, 동시에 프랑스와 그 꼭두각시 지도자 바오 다이 Bao Dai에게 민족주의자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만들라고 압박하는 것! 결국, 애치슨은 이같은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본래 아이젠하워 정부도 인도차이나 안보에 대한 미국의 공약을 의문시하지 않았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이미 1950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 "인도차이나는 가장 다루기 어려운 대외정책 문제들 중 하나다." 프랑스의 식민주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덜레스는 프랑스를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심했다 : "자주 발생하는 경우에서 처럼, 실용적인 관점에서, 두개의 악 중에서 덜 나쁜 악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론적으로 최선의 해법은 많은 이유들 때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트루먼 정부의 정책 유산인, 미국이 인도차이나에서 호치민의 베트민과 싸우고 있는 프랑스에 대한 지원을 늘린다는 정책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인도차이나 개혁을 위한 압력을 행사하면서, 자신의 전략 원칙과 도덕적 확신간의 모순을 해소하려 했다. 1953년 5월, 취임 4개월만에, 그는 미국주재 프랑스 대사, 더글라스 디옹에게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권위있는 새 지도자를 임명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는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자마자, 인도차이나의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공약해야만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가 곧 직면하게 될 것은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프랑스의 승리가 아니라, 디엔비엔푸 전투였다. (1954년 3월 13일부터 5월 7일까지)


그렇다면, 인도차이나에서의 프랑스 제국주의의 몰락이자, 동시에 호치민의 공산주의 세력의 승리를 알린 디엔비엔푸 전투에 대한 아이젠하워의 대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왜 아이젠하워의 미국은 디엔비엔푸 전투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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