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아데나워 그리고 독불화해" (끝) 유럽외교사

"드골,아데나워 그리고 독불화해" (1)

하지만, 두 지도자간의 새로운 관계는 곧 시험에 들었다. 서독 총리의 콜롱베 방문 이틀 후, 드골은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와 영국 총리 해럴드 맥밀란 Harold Macmillan에게 전문을 보내, 미국,영국 그리고 프랑스가 세계안보에 영향을 주고, 계획을 수립하며, 필요할 경우 이를 집행할, 3자 기구 a tripartite organization 를 결성, 이 기구를 통해 특히 핵문제를 다루자고 제안했다. 


동시에 드골은 서독 총리를 안심시키려 했다. 그는 세이두 대사에게 아데나워에게 드골의 의도를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3자 이사회 the tripartite directorate 가 세계문제를 위한 것이지, 유럽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해명했고, 핵무기를 보유만 국가들에게만 해당사항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데나워는 이에 실망하면서, 미국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 정확하게 충고했다.


당시 아데나워가 얼마나 불쾌하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3주 후에 본을 방문했던 영국의 맥밀런 총리의 일기에 나타나 있다. 맥밀런 총리는 일기에서 3자 이사회 제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아데나워는 불만과 분노를 드러냈다. 그는 드골을 믿었었다. 그들은 불과 수주 전에 비밀 회담을 가졌었다."라고 썼다. 다음 날의 일기에서 맥밀런은 "총리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가 다시 드골을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다른 사건들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맥밀런이 주목했던 아데나워의 분노는 영원히 계속되었을 지도 모른다. 아데나워 주위의 많은 측근들은 프랑스의 영향에 대해서 그에게 경고했다. 즉 드골이 독일과 미국,영국사이를 이간질 시키기를 원한다고 것이었다. 드골이 11월 26일, 아데나워를 방문했을 때, 베를린에 대한 소련의 최후통첩이 인박했다. 6일전에, 본 주재 소련대사가 아데나워에게 자국 정부가 베를린에서의 점령국 지위를 청산할 것이라 통보했던 것이다. [1958년 11월, 소련의 흐루쇼프는 최후통첩을 통해, 서양 점령국들이 6개월안에 베를린에서 철수, 이 도시를 자유롭고,비무장 도시로 만들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흐루쇼프는 6개월 뒤, 소련은 서베를린으로의 모든 통행권에 대한 통제권을 동독에게 넘길 것이고, 서양 점령국들은 동독정부의 허락을 받아야만 서베를린으로 갈 수 있다고 선언했다.]


드골은 아데나워에게 프랑스는 베를린 문제에 대해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다. 베를린 위기의 시절 동안, 아데나워는 드골이 서독의 확고한 동맹이라는 생각하게 된다. 두 사람간의 첫번째 만남 직후에 시작된 베를린 위기는 드골-아데나워 관계와 독불화해를 공고하게 만들었다.


아데나워는 영국의 맥밀런이 미국을 설득, 베를린에 대한 양보를 관철시키지도 모른다고 항상 우려했다.[서독이 배제된 가운데, 베를린 위기에 대해서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간의 뮌헨협정식의 타협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였다] 그는 맥밀런이 소련에 대해 유화적이라고 생각했고, 독일,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를 모두 중립화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수용할 의사가 있다고 우려했다. 1959년 겨울, 맥밀런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아데나워와 드골이 그의 방문사실이 대중에게 공개되기 3일전까지도 이 사실을 통보받지 못했고, 서독 총리의 불신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는 드골이 연합국 회의에서 어떠한 타협에 대해서도 완강하게 반대한 사실에 대해 감사했다.


아데나워는 냉전의 주요 문제들을 논의를 위해, 1960년 5월 파리에서 열리기로 한 회담에 초대받지 못했다. 날짜가 다가오면서, 그는 더욱 근심에 사로잡혔고, 프랑스 대사 세이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이번 회담에서 어떠한 좋은 소식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드골 장군만을 믿는다." 결국 회담이 결렬되자, 아데나워는 안심했고, 드골만의 그의 유일한 진정한 동맹이라 느꼈다. [파리 회담 개최 직전에, 미국의 U2 정찰기가 러시아 상공에서 격추되고, 이에 따라 긴장이 고조되면서 회담이 결렬되었다.]


물론 미국은 베를린 위기에서 연합국이 소련의 요구를 수용하기를 거부하는데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베를린에 대한 양보를 할지도 모른다는 아데나워의 의심은 계속되었고, 이는 그의 회고록에 나타나있다. 특히, 1959년 2월의 미국 국무장관 덜레스와의 회담과 1959년,1960년 정상회담에서의 아이젠하워의 발언에 대한 그의 의구심이 회고록에 기록되어 있다.


베를린 위기의 위험을 넘어, 아데나워는 미국이 결국 짐을 싸고, 유럽대륙을 떠날 것이라 두려워했다. 아데나워의 두려움을 고조시키면서, 드골은 서독에게 프랑스가 미국 보다 더 믿을만한 동맹국으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참고- The Linchpin: French-German Relations, 1950-1990. Contributors: Julius W. Friend - author. Publisher: Praeger. Place of Publication: New York. Publication Year: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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