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대외정책,1928-1939" 유럽외교사

키신저, "스탈린은 당대의 리슐리외였다!"

일반적으로, 대외정책은 국내정책의 연장이며, 그 주요 사명은 국가의 안보를 보장하는 것이다. 소련의 대외정책은 자본주의 국가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2개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 국가 소련의 안보를 증진시키는 것과 세계 사회주의 혁명을 고무시키는 것! 이를 위한 국제 조직,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혹은 코민테른이 있었다. 코민테른은 1920년대 말부터 스탈린의 대외 정책의 도구가 되었다. 코민테른은 1943년에 소련의 대외정책이 팽창주의라는 의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해체되었고, 그 기능은 새로 신설된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국 International Department of the Central Committee of the Communist Party 이 담당했다. 소련의 대외정책은 항상 세계적이었지만, 물론 특정한 국가들과 지역들도 여러번 매우 중요했었다.


1920년대에 대외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경험은 매우 적절하지 못했다. 큰 충격은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과 전술적 동맹에서 발생했다. 1927년 국공합작군이 장악하고 있었던 상해에서, 국민당이 공산주의자들을 학살했던 것이다. 소련은 장개석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고 지나치게 확신한 나머지, 상해 반공 쿠데타 직전에 장개석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명예 회원으로 위촉했던 것이었다! 상해 참사 이후, 스탈린은 국제문제에서 더 신중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그는 장개석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았고, 그를 교화시켜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서 장개석이 공산당과 대적시키게 만들었다. 중일전쟁 발발으로, 1938년 2월 장개석은 스탈린에게 대 일본 선전포고를 요청했다. 스탈린은 거절했다.  1938년 5월, 하지만 그는 국민당에게 무기와 수백만 달러의 자금을 제공할 준비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비밀회담과 거래하는 스탈린이 선호하는 대외 문제 해결 방식이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가 점점 승리를 향해 나아갈 것이라 믿었다. 이것은 국가들이 제국주의 진영에서 이탈, 사회주의 진영에 가입할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같은 상황이 발상할때, 소련은 세계혁명의 발전을 위한 기지가 되고,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견인차가 될 것이었다.


1930년대 소련은 약한 국가였다. 따라서 스탈린의 핵심 목표는 자신의 조국이 어떠한 전쟁에도 가담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소련을 가능한 많은 국가들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도록 만들었다. 1932년 1월과 3월 사이, 핀란드,라트비아 그리고 에스토니아와 조약을 맺었고, 1932년 7월 폴란드와, 1932년 11월 프랑스와 그리고 1933년 9월 이탈리아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들의 목표는 무력 사용 금지에 대한 합의, 경제 봉쇄 참여에 대한 거부, 상대국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을 삼가하고, 조약 상대국의 제3국과의 분쟁에서 중립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 조약들은 소련의 국제연맹 the League of Nations 가입 [1934년 9월18일] 의 초석이 되었고, 소련을 집단안보 collective security 정책의 동반자로 만들었다. 1931년-1932년 극동에서의 일본의 팽창과 1933년 1월 히틀러의 독일 총리 임명이 집단안보를 더욱 긴급한 것으로 만들었다. 스탈린은 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반 파시스트 정당들을 규합하는 인민전선 정권 Popular Front governments 의 수립을 지지했지만, 프랑스에서의 인민전선 정권 수립을 제외한다면, 인민전선론은 공산주의자들의 신뢰 부족과 나치 독일의 위협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차이 때문에 탄력을 받지 못했다.


이같은 스탈린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일본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1939년 5월-8월, 몽골과 만주국 국경에서의, 노몬한 전투(할힌골 전투)는 일본이 자신의 동진정책을 재고하도록 만들었다.이 전투에서, 주코프 장군 휘하의 소련 붉은 군대는 현대 전쟁사 최초로, 탱크,대포,공군 그리고 육군의 통합 공격전술을 실천했다. 1939년 8월의 독소불가침조약 체결은 일본이 소련-일본간의 세력균형의 추가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점을 알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서, 도쿄는 1941년 6월, 일소중립조약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을 체결하게 된다. [참고 - "기묘한 동맹?" 일소중립조약 Japanese-Soviet Neutrality Pact - http://kk1234ang.egloos.com/2795670] 모스크바에게 행운이었던 것은, 1941년 7월, 독소전쟁 발발 직후, 일본의 민간,군부 지도자들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했을때, 워싱턴은 모스크바에 소련의 극동에서 공군기지 사용을 요청했지만, 이는 거부되었다. 스탈린은 독일 패망 이후인, 1945년 8월 8일이 되서야,일본과의 전쟁을 개시했을 뿐이었다.


출처- Mccauley, Martin, Was Stalin's Foreign Policy a Failure?.Journal Title: History Review. Publication Year: 1999 중에서...

[보충 자료]
1. 전간기 소련 외교의 중심 원리- 스탈린에게, 소련 안보정책의 일차적 목표는 자본주의 열강의 분쟁에 휘말리지 않는다 였다. - http://kk1234ang.egloos.com/2700262

2. 스탈린,러시아 차르에 대해,1937년...- http://kk1234ang.egloos.com/2699927


3. 스탈린, 외교정책에 대해...- http://kk1234ang.egloos.com/2700264




덧글

  • 라라 2012/02/17 15:56 # 답글

    일본이 조약 깨고 41년에 소련 공격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듯 싶지만

    진주만 공격은 안 하고

    미국의 랜드리스가 소련에 가는 태평야 루트를 막으면

    또 어찌 됏을지 모르겟군요.
  • 파리13구 2012/02/17 16:05 #

    유라시아 대륙을 독일과 일본이 반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 라라 2012/02/17 16:12 #

    그리고 조선은 제국의 일부에

    조선인은 2등 신분..

    몽골제국 간섭기와 비슷해 질듯....

    로스트 메모리즈 영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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