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르니히,100년의 유럽 평화를 설계하다! 유럽외교사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Klemens Wenzel Lothar von Metternich, 1773년 5월 15일 - 1859년 6월 11일)는 오스트리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가로 당대의 가장 중요한 외교가였다.


본질적으로, 메테르니히 공은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같은 새로운 낭만주의 사상이 무의미하다고 간주한 18세기의 합리주의자였다. 그는 정치가가 그 인민이 말하는 언어로 자신의 충성을 한정한다는 것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그는 문맹의 일반 백성이 정부에서 발언권을 가지는 것도 어리석다고 간주했다.


그는 따라서 국제사회가 "정통성과 복고"를 구호로 채택해야만 한다고 믿는 것처럼 가장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헌신적인 왕조 충성파는 아니었다. 필요에 따라 그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같이 오래되고, 정통성있는 왕가의 폐위를 완벽하게 준비하기도 했다.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오스트리아를 프랑스,러시아 그리고 프로이센으로부터의 경쟁을 감당할 정도로 충분히 강력한 열강으로 보존하는 것이었다. 8개의 주요 언어를 말하는 민족으로 구성된 다국적인 오스트리아는 민족주의가 엄격하게 탄압받을 때에만 존재할 수 있었다. 다뉴브강 유역의 통일과 모든 중유럽의 상업적 번영을 보장하는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에 대한 충성으로 정의되어야만 했다. 황제의 경쟁력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 덕분에 메테르니히가 그를 조종할 수 있었다.


오늘날 메테르니히를 완전한 반동으로 간주하는 것이 유행이지만, 이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를 무시하는 것이다. 메테르니히가 1815년에 설계한 유럽은 제1차세계대전 직전인 1914년까지 살아있는 세력 균형을 유지했다. 세계대전 이후 중유럽이 분할되고, 많은 명목상의 국가들이 탄생한 것을 보면, 그 이름이 1815-1848년의 시절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할, 이 실용적인 회의론자에 대한 새로운 존경심을 유발한다.


클레멘스 벤첼 로타어 폰 메테르니히는 1773년 5월 15일, 프란츠 게오르크 폰 메테르니히 공 (Count Franz Georg von Metternich)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가 오스트리아 사절로 일했던,마인츠,티에르 그리고 쾰른의 궁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잠시동안 자연과학과 의학 연구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는 1788년-1790년 동안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정치학,법학 그리고 역사 공부에 전념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 초기의 폭력 때문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프랑스혁명의 폭력을 경험한 1794년의 메테르니히는 <보편적 평온의 벗인, 프랑스 국경의 인민들의 무장 필요성에 관하여>라는 소논문을 작성했다. 그는 구세대 외교관들의 편협한 태도를 비판했고, 인민의 무장과 봉기만이 프랑스 혁명군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인생의 말년에 위대한 최후의 구세대 외교관이 될 사람이 주장하기에는 이상했고, 그가 이후 모든 인민 주권의 표현을 비관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을 상대하면서 그는 몇번 실수를 범했지만, 그 때마다 그는 오스트리아에 유리하게 만들려고 노력했다.처음에 그는 나폴레옹이 무적이라고 간주했지만, 스페인에서의 사건으로 프랑스 독재자의 약점을 확신한 이후, 그는 나폴레옹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에 대한 나폴레옹의 승리 이후, 그는 나폴레옹과 프란츠 황제의 딸 마리-루이즈간의 결혼을 주선했고,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의 위성국이 되는 것을 막았고, 오스트리아가 제한적인 외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만들었다. 메테르니히는 오스트리아의 재정적 군사적 고갈로 인해, 다른 행동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프란츠 황제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책략,둘러대기 그리고 아첨으로 만족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해야만 우리는 결산의 그 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한가지 선택만이 남아있습니다. 더 나은 시절을 위해 우리의 힘을 보존하고, 우리의 이전 정책과는 무관하게, 스스로를 돌보는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같은 발언에는 나폴레옹에 대한 영원한 불신이 드러나 있었다.


메테르니히는 러시아 정책도 불신했고, 오스트리아를 희생해서 동남부 유럽으로 진출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였다. 뿐만아니라 그는 프랑스와 러시아가 충돌할 것이라 확신했고, 나폴레옹의 우위를 확신, 프랑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전쟁의 결과에 경악했지만, 나폴레옹의 패배가 오스트리아에게 신선한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점을 간파했다. 나폴레옹 권력의 파괴 혹은 최소한의 제한이 유럽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역할의 복원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었다. 동시에, 메테르니히는 러시아의 승리가 러시아의 중유럽으로의 세력확장으로 귀결될 것이고, 바로 이곳에서 오스트리아의 야심과 충돌할 것이라 보았다. 그는 프로이센 총리, 칼 어거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공 Prince Karl August von Hardenberg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했다."러시아 세력의 비약적 성장은 프랑스 제국의 파괴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메테르니히는 프랑스를 유럽외교의 장기판의 생존가능한 동반자로 살리려고 노력했고, 그는 통제가 가능하다면, 나폴레옹에게 프랑스를 맡길 용의도 있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그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오자, 메테르니히는 그의 엘바섬 유배를 더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메테르니히의 기본적 목표는 유럽 문제에서 열강이 협력적으로 행동하자는 원칙이었다.


당시 메테르니히의 다른 관심사는 성장하는 프로이센 세력이었다. 그는 독일에서의 주요 경쟁자로 프로이센이 성장하는 것을 경계했다. 그는 바바리아와 라인의 독일 연방 국가들에게 주권적 지위를 부여하고, 그들이 독립 목표를 추구하도록 장려함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따라서 그들은 독일 통일이라는 감언이설에 무관심했고, 오스트리아는 독일문제에 대해, 전통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814년 9월부터 1815년 6월까지의 빈 회의 The Congress of Vienna는 메테르니히 외교 경력의 정점이었다. 유럽의 크고 작은 국가들이 함께 모여서, 나폴레옹 몰락 이후의 신질서 a new world order 를 구상했다. 하지만 고상한 목표를 추구하는 대신에, 그들은 구태를 반복했다. 러시아는 전체 폴란드를 원했고, 프로이센은 전체 색소니 Saxony를 원했다. 메테르니히는 프랑스의 샤를 모리스 탈레랑 Charles Maurice Talleyrand과 영국의 로버트 스튜어트 캐슬레이 Robert Stewart Castlereagh를 끌어들여서, 러시아의 중유럽 침투와 프로이센의 확장을 막는데 성공했다. 러시아에게 더 작은 폴란드 땅을, 프러시아에게 색소니의 2/5를 떼어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연방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가 롬바르디와 베네치아를 제국의 일부로 획득했고, 교황 및 이탈리아 군주들과의 조약을 통해, 나머지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했고, 혁명이 구체제를 위협할 경우, 오스트리아의 군사 개입 권리를 보장받았다.


빈조약 The treaties of Vienna은 메테르니히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실제로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유럽의 정치인들은 안정적인 유럽질서를 만들어냈고, 이후 40년 동안의 평화를 만들었고, 이후 100년 동안 모든 열강이 가담하는 전쟁을 방지했다. 이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업적이었다. 

출처- Great Leaders, Great Tyrants? Contemporary Views of World Rulers Who Made History. Contributors: Arnold Blumberg - editor. Publisher: Greenwood Press. Place of Publication: Westport, CT. Publication Year: 1995. Page Number: 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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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비인 2012/01/27 08:54 # 삭제 답글

    힘의 균형 달성을 이른바 진보적 가치들보다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하는 해석이군요. "잔인한 20세기의 경험action에 대한 반동reaction의 입장에서 바라 본 반동적 정치가reactionist 재해석"(?)
  • 파리13구 2012/01/27 09:59 #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
  • 매직동키라이드 2012/03/10 01:48 # 답글

    아 잘 봤는데 좋은 글에 오타가... 전무후무를 전후무후라고 쓰셨네요;
  • 파리13구 2012/03/10 07:55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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