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 "혁명적 시대의 보수주의자!" Le monde

비스마르크 : 독일적 운명의 인간


A.J.P. 테일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15년에 태어나, 1898년 6월 30일에 사망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프로이센은 보잘것없는 열강이었다 ; 하지만 그가 사망했을 때, 독일은 이미 유럽을 주도하고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한 것이 아니다. 인구 증가와 경쟁자가 없는 중공업은 독일의 위대함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 비스마르크의 업적은 이같은 위대함에 절제를 제공했다는 점에 있다.


신분적으로나 신념적으로 보수주의자였던, 그는 메테르니히 만큼 "대격변"을 혐오했다. 단지 그의 방법만은 달랐다. 메테르니히가 혁명과 붕괴를 반대했다면, 비스마르크는 독일혁명을 주도했고, 그것을 조종했다. 그는 적을 속이기 위해 대중 선동 표현을 이용했다. 그는 독일을 통일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그는 독일과 합스부르크를 분할했다. 그는 군사력 독트린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그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에 대한 승리로부터 가장 최소한의 이익만을 취했고, 이후 양국이 허세적인 위대함과 독립을 추구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독일에 보통선거를 도입했지만, 그는 이를 자신의 계급, 특히 스스로를 위해 이용했다. 그는 "철혈"을 설교했지만, 유럽의 평화를 추구했다 ;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군복을 즐겨 입었지만, 그는 군부에 대한 문민 지배를 주장했다.


그는 복잡한 감정의 소유자로 친구가 없었고, 추종자들만이 있었다. 그는 그의 적들을 혐오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지지자들을 경멸했다. 그는 그의 아내와만 안정적이고 완벽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사랑은 상호적이었지만, 그는 그들의 밀접한 관계라는 신화에 대해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는 호엔촐레른 가문에 충성을 바쳤지만, 빌헬름1세와 빌헬름2세에 대해 경멸적으로 말하기도 했고, 정계은퇴 이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내가 만약 정치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나는 공화주의자,민주주의자가 될 것이다." 진정한 천재로 그는 독일 정신의 모순을 구현했다.


그는 1848년에 사실상 정계에 입문했고, 평생동안 혁명적인 시대의 인간으로 남았다. 사회적 격변과 국제적 고립은 그가 가진 2개의 악몽이었다. 안보는 국내와 국외에서 그의 정책 목표였다. 그가 한 모든 것은 위험에 대항한 보험이었고, 비록 몇가지는 그의 상상의 산물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수세대 동안 열강의 관계는 러시아가 한편에, 영국과 프랑스가 다른 한편에 있는 것이었고, 이것이 중유럽의 판도를 결정했다.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인접국가들을 고립시켰고, 그의 법칙을 중유럽에 관철시켰고, 프랑스와 러시아가 그의 법칙에 따르도록 만들었다.


그는 1862년 프로이센의 총리가 되었다. 2년 안에, 그는 유럽 협조체제의 위선을 폭로했고, 슐레스비히-홀스타인에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고, 이렇게 카이저와 독일의 민족감정, 그의 명목상의 동맹인 오스트리아 그리고 열강을 실망시켰다. 그리고 2년 뒤인 1866년, 그는 러시아와 프랑스가 자신들의 안보가 걸린,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간의 세력 균형의 붕괴를 용인할 수 밖에 없게 유인했다. 사도바 전투는 프로이센을 독일에서 최고로 만들었다 ; 하지만 이 전투로 합스부르크 왕가를 파괴시킨 것은 아니었다. 대신에 비스마르크는 마자르족과 협조하여, 합스부르크의 보존을 도모했고, 이를 통해 '대독일' 주장에 맞서는 안전판을 확보했고, 프로이센을 발칸반도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 동일하게 1870,1871년에, 그는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패배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제있는 승리를 추구했다. 그는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했던 것같은 짓거리를 하지 않았다.


1871년 독일통일 이후, 비스마르크는 세력균형의 최고 지지자가 되었다 : 독일의 안전을 추구했던,그는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게 그것을 강요했다. 그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파괴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 동시에 그는 발칸에서의 오스트리아의 야망을 지지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 덕분에, 영국은 전혀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의 후원 아래,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제국을 건설했고, 러시아는 중동과 극동으로 팽창했다. 베를린 회의에서 처럼, 비스마르크는 정직한 평화의 보증인이었다 ; 그의 동맹체제에서 모든 열강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평화노선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독일 국내에서도 비스마르크는 균형을 추구했다. 자유주의자의 도움으로 그는 융커들로부터 양보를 강제했고, 융커의 지원을 받아 자유주의자들을 견제했다. 그는 우선 민족주의적 격분을 조장, 로마 가톨릭을 길들였고, 가톨릭 중도파를 급진적 민족주의에 대한 제동장치로 이용했다. 독일 민족주의를 견제하는 것은 열강을 견제하는 것 만큼 쉽지 않았다. 비스마르크의 제국은 독일에 대해 관심이 전혀 없는 융커들에 의해 지탱되었다; 그는 로마 가톨릭과 사회주의자들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1890년 그는 실패를 인정했고, 빌헬름2세는 그를 사임시켰다.


비스마르크의 실패는 격동의 시대의 보수주의의 실패였다. 독일은 세계적 강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야심을 단지 지연시킬 수 있었을 뿐이었다. 괴테에 따르면, 그의 위대함은 그의 자제심에 있다. 근대유럽사는 3명의 거인의 관점에서 서술될 수 있다 : 나폴레옹,비스마르크 그리고 레닌. 이 3명의 거두들 중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뛰어났던 천재, 비스마르크는 이들 중에서, 아마도 가장 덜 해로운 사람이었다. 


출처- A.J.P. 테일러, <나폴레옹에서 스탈린까지 - 유럽사에 관한 단상>, 1950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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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萬古獨龍 2011/10/25 01:13 # 답글

    한 인물이 어떻게 세계를 조율하는가를 지켜볼때, 그는 분명 경이롭기까지 한 사람이죠.
  • 파리13구 2011/10/25 04:45 #

    네, 동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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