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은 소련 붕괴를 두려워했다!"(끝) Le monde

"서양은 소련 붕괴를 두려워했다!"(1)


<프랑수아 미테랑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역사 - 서양은 독일이 재통일된 이후에도 여전히 두려워했나?


수투- 독일 재통일의 순간의 두려움에, 1990년말부터 다른 두려움이 추가되었다 : 소련이 유고슬라비아 모델로 폭발적인 해체를 겪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폭력적인 일련의 사건들이 코카서스에서 발생하자, 이 시나리오를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더 심각한 것 : 1991년초, 발트해 국가들이 독립했다. 이같은 변화는 소련은 이탈하는 것이 가능한 부분들의 연방이라 규정하고 있는 소련 헌법의 관련 조항에 따라 가능했던 것이다.


이 헌법 조항은 소련 공산당의 힘이 강했을때는 워협적이지 않았다 ; 이것은 공산당이 연방 공화국들에게 더이상 자신의 입장을 관철시킬 수 없고, 당지도부가 아무튼 더이상 폭력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도박을 걸었을 때, 문제가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소련 없는 세계의 가능성이 명확해졌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서양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다. 냉전은 일련의 조약들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국제관계에서 상당한 안정을 가져왔던 것이다. 우리는 1986년의 책(프랑스 대외정책에 관한 생각들)에서 프랑수아 미테랑이 제기한 유명한 이론을 기억해야 하고, 그것은 바로 러시아가 항상 유럽과 세계에서 평형추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소련의 해체는 현재의 안정을 위험에 빠트리고,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할 것이다라는 우려였다 : 만약 소련이 사라지게 된다면, 누가 국제연합에서 소련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인가? 누가 소련의 핵무기를 인수할 것인가? 누가 소련의 부채를 인수할 것인가? 확실히 우크라이나는 아니었다...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 - 프랑스의 자크 아탈리는 1989년 12월 6일, 키에프에서 열린 소련-프랑스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가 미테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회고했다 ; "독일의 재통일을 막기위해 나를 도와달라.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소련] 장군들에 의해 대체될지도 모른다. 이것이 서양에게 이익이 될까?" 이같은 소련 군부 쿠데타에 대한 공포때문에 ,프랑스 대통령은 끝까지 고르바초프를 지원했다고 한다.)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서양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소련이 유지되기를 원했다. 서양은 소련내의 모든 독립요구 시위들에 대해 유보적인 태도를 취했다. 1991년 6월, 키에프를 방문한 미국의 아버지 부시대통령은 우크라니아인들에게 소련진영에 남으라고 존언했다. 서양은 또한 발트해 국가들에 대해 가장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서양은 발트해 국가들의 독립을 러시아가 그것을 인정한 이후인 1991년 9월에 가서야 인정했다. 서양은 발트해 각국의 의회들이 독립을 선언한지 몇달이 지나서야, 그 독립을 승인했었던 것이다. 각국 대사관들도 질서를 강조했다 : 서양이 소련의 붕괴를 선호한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됐다. 많은 것들을 협상해야만 하는 모스크바의 신용을 잃어서는 안됐기 때문이다.


역사 -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여전히 위협적인 위험에 맞서는 보루인 것처럼 보였나?


수투- 고르바초프파는 약하지 않았다. 이같은 이유 때문에, 1991년 6월 러시아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보리스 옐친은 매우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서양은 그가 위험한 경쟁자이고,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약화시킬 수 있는 위협이고, 러시아를 민족주의로 이끌 것이라 우려했다. 그의 첫 유럽의회 방문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1991년 8월, 군사반란이 발발하자,반란세력은 동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알지못하는 것으로 보였던 가운데. 서양은 미하일 고르바초르를 계속 지원했다. 미국 정보당국은 반란음모가 획책 중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이를 조언자들에게 보고했다.


영국은 같은 정보를 파악했고, 이를 보리스 옐친에게 통보해 주었다. 존 메이저의 주도아래, 영국은 풍향이 바뀌었다는 점을 간파했고, 옐친에게 도박을 걸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했다. 하지만, 영국만이 이 점을 간파했다. 다른 유럽국가들과 미국은 군사반란이후에도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계속 지원했고, 그만이 소련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역사 - 서양은 언제 소련이 끝장났다는 점을 이해했나?


수투- 1991년 11월 중반, 서양은 고르바초프의 연맹연합 계획이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사태가 매우 빠르게 전개되었다. 12월초, 보리스 옐친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와 함께, 독립국가연합 창설에 합의했다. 소련이 1991년말에 결국 해체되자, 서양은 승리감에 도취되었다. 서양은 놀라움에 사로잡혔고, 사태의 추이를 예견하지 못했고, 동시에 최악의 상황을 피했다 : 내전은 없었고, 러시아는 핵무기 통제권을 유지했고, 국경선의 윤곽이 유지되었다. 사태의 결산은 전체적으로 부정적이지 않았다.       


역사 - 러시아의 반응은 어떤 것이었나?


수투- 소련의 붕괴는 우선 거대한 희망을 탄생시켰다. 러시아인들은 공산주의 경험을 이제 끝장낸 만큼, 그들은 이제 서양의 호의를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서양이 그들의 경제 재건을 위해 도울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은 일종의 마셜플랜을 원했다. 하지만 어떤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부채 조정도 매우 유연하게 전개된 것도 아니었다. 물론, 몰타 정상회담에서의 약속 지켜졌다 : 러시아가 국제통화기금에 가입했다. 서양은 또한 경제의 탈국유화를 위해 돕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서양이 한 것은 시카고 학파의 학자들을 파견한 것이 전부였고, 이같은 신자유주의적 방법은 러시아라는 제도에도, 국민의 정신상태에도 부합되지 않았다.


체제반대파를 포함, 많은 러시아인들은 서양이 소련체제의 붕괴를 조장했다고 확신하고 있고, 이는 소련이라는 불곰을 토막내기 위해서 였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서양이 주도한, 소련붕괴 음로론은 잘못된 것이다. 유럽인들도 미국인들도, 어느 누구도 소련의 붕괴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서양은 그것을 막기 위해 모든 것을 했고, 이는 서양이 그 결과에 대해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덧글

  • 사바욘의_단_울휀스 2011/10/23 15:38 # 답글

    누구나 의도하지 않은 변화를 좋아하긴 쉽지 않죠.
  • 파리13구 2011/10/24 08:21 #

    그렇습니다...
  • 행인1 2011/10/23 17:41 # 답글

    1. 옐친이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가장 먼저 예측한 나라가 영국이라니 의외군요. 샇아놓은 경험덕분인지...

    2. 러시아 경제의 탈국유화는 그럭저럭 이루어지긴 했습니다. 결과물이 참담해서 그렇지.(소수의 과두재벌이 싹슬이)
  • 파리13구 2011/10/24 08:22 #

    1. 이번에 카다피 제거에서도 활약했다고 합니다.

    2.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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