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일본군 파병문제와 이토 히로부미" 유럽외교사

일본 현대사, 특히 쇼와사에서 군통수권 문제는 중요했고, 일본군부는 천황만이 군을 통수,편제할 수 있고, 추밀원 및 의회가 이에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하지만 메이지 시대인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파병관련 논의를 보면, 통수권 문제는 이 때부터 문제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조선이 청나라에게 지원병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톈진조약에 따라 파병사실을 일본정부에게 알렸고, 일본 정부는 자신의 대응을 결정해야만 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이같은 조선정세의 급변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 총리는 출병을 결의하기는 했지만, 이 시점에서 청나라와의 전쟁까지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토는 외국이 개입할 것을 걱정했다고 한다. 따라서 이토는 파병이 결정된 뒤에도, 가와카미 소로쿠 川上操六, 육군 참모차장에게 파병 병력수를 최대한 줄이라고 지시했다. 갑자기 대군을 보내면 전쟁을 치를 의지를 과시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가와카미는 "그렇다면 1개사단을 보낼 수도 있지만, 1개 여단으로 하겠다."라고 답변했다. 당시 사단은 8천명, 여단은 3천명 전후였다고 한다.


이토는 여단 규모도 많다고 생각했지만, 메이지 헌법에 따라, 정부가 군의 편제에 간섭할 수 없다는 원칙을 수용,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가와카미는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이 지휘하는 전시편제 7천명의 혼성 여단을 파병했다. 결과적으로 이토가 속았던 것이다.


한편, 오시마 여단의 출병을 맞아, 오야마 이와오 육군대신은 후쿠시마 야스마사 중좌, 우에하라 유사쿠 소좌를 무관으로 임명, 서울에 파견했다. 오야마는 두 사람에게 "이번 출병은 공사관,영사관,거류민의 안전을 보호하려는 것이며, 결코 청국과 전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는 점을 명심하라고 훈시했다.


하지만, 가와카미 참모차장이 두 사람을 다시 불러, 대신의 명령은 공적인 명령으로만 받고,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명령에 구애받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일본 정부와 육군성은 전쟁을 위한 파병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참모본부는 이미 전쟁을 결의했으니 각오하라고 했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반세기 뒤, 중앙의 지휘를 묵살하고 제멋대로 작전을 전개, 일본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일본 관동군 방식의 맹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아니라 정부 내에도 강경방침에 동조하는 자가 있었으니, 무쓰 무네미쓰 외무대신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미요시 도오루의 <이토 히로부미>에 따르면, 전쟁에 관련된 이토 히로부미의 기본입장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그는 정치적 거래나 외교 교섭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이보다 뛰어난 방책은 없다고 여겼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정치를 담당한 자의 의무라 보았다. 이토는 군대를 보내 해결하는 것을 가장 하급책이라 믿었다."




덧글

  • 2011/10/12 14:51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파리13구 2011/10/12 14:52 #

    그렇습니다...^^
  • LVP 2011/10/12 14:53 #

    갑자기 생각난건데....

    그나마 전기톱을 안가져온 걸 다행으로 알아야 하나요 'ㅅ';;?? (....)
  • 파리13구 2011/10/12 14:54 #

    글쎄요..^^
  • 라라 2011/10/12 15:13 # 답글

    손자병법에 나오는 말인데 알면서도 실행하기는 어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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