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전반기 미국의 대일정책 기조...
1940년 가을, 미일관계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그해 6월 프랑스가 독일에 6주만에 패배했고, 이에 일본은 이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출의 기회로 인식했다. 이렇게 9월 22일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입했고, 9월 27일,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삼국동맹을 결성했다.
10월 4일 미국 국무회의가 열린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당시 미국정부 내에서 대일 강경파를 대표했던 헨리 스팀슨 Stimson 국방장관은 과거 시베리아 원정 시절의 미일관계에서 발생했던 일을 인용했다. 1918년 일본은 미일간의 합의를 깨고, 시베리아에서 자국 원정대를 증파한 적이 있고, 이것이 윌슨을 분노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이 일을 인용하면서, 스팀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19년 가을, 윌슨 대통령이 격분해서, 모든 대일 면사수출과 일본산 비단의 수입 금지를 결심하자, 그 결과, 일본은 2달만에 굴복했고, 마치 죽도록 얻어맞은 개처럼, 시베리아에서 자국 군대를 철수시킨 바 있다."
이렇게 진주만 기습 이전, 미국정부의 대일강경파들은 일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미국과의 전쟁을 피할 것이라 보았고, 대일 강경책이 일본의 남진을 막고, 일본을 굴복시켜서, 결국 전쟁을 방지할 것이라 보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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