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데하라 외교? 1920년대 일본의 자유주의 외교... 유럽외교사

만주사변과 영국,미국의 대응...

다음은 관련 영문 위키페디아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

시데하라 기주로 Kijūrō Shidehara (1872-1951)


그는 제2차세계대전 이전 일본외교관이었고, 1945년 10월 9일부터 1946년 5월 22일까지 일본의 44대 총리를 역임했다.그는 제2차세계대전 전후, 일본에서 대표적인 평화주의 주창자였다.


1924년, 시데하라는 카토 다카아키 총리 내각의 외무장관이 되었고, 와카쓰키 레이지로,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에서도 같은 직위에 있었다. 일본의 군국주의 확산에도 불구하고, 시데하라는 중국에 대한 불개입정책을 고수하려고 노력했고, 그가 존경했던, 영국과 미국와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일본국회에서의 취임연설에서, 그는 국제연맹의 원칙들을 지켜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데하라 외교>라는 용어는 1920년대 일본의 자유주의적 외교정책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1927년 3월, 남경사건 (중국 공산당이 남경을 장악한 사건) 동안, 그는 장개석 국민당군에 의한 외국인 외교관과 주민들에 대한 공격 행동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다른 열강이 제안한 최후통첩에 동의하지 않았다.


시레하라의 중국정책에 대한 군부의 불만은 1927년 4월, 와카쓰키 내각 붕괴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의 외교관 경력 동안, 시데하라는 뛰어난 영어 구사 능력으로 명성이 있었다. 한 기자회견에서, 미국 기자가 시데하라라는 이음의 발음을 혼동한 일이 있었다. 이에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히데하라 Hi(he)-dehara 고, 내 아내는 쉬데하라 Shi(she)-dehara 입니다."라고 답변했다고 한다.


시데하라는 1929년에 외무장관직에 복귀했고, 즉시 중국 불개입정책을 이어나갔고, 남경의 장개석 정권과의 우호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이 정책은 그것이 일본을 약화시키고 있다고 믿었던 군부의 맹공을 받았고, 특히 1930년 런던 해군 군축회담의 타결 이후에 그랬고, 이것이 중요한 정치위기를 유발했다.


1930년 11월 14일 하마구치 오사치 총리가 암살기도로 인해 심각한 부상을 당하게되자, 시데하라는 1931년 3월까지 임시 총리를 맡았다. 1931년 9월, 관동군은 중앙정부의 승인없이, 만주사변을 도발, 만주를 침공,점령했다. 이는 일본의 대중국 불개입정책의 종말이자 또한 시데하라의 외무장관 경력의 종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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