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일전쟁과 독일... 유럽외교사

독일-중국 관계 1911-1941년



중일전쟁은 1937년 7월 7일 시작되었고, 그해 8월부터 11월초까지 어떠한 진지한 종전 협상 시도는 없었다. 하지만, 남경 함락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일본은 분쟁을 종결짓기 위한 또다른 노력에 나서게 된다. 이를 위해, 일본은 독일에게 도움을 요청, 중국 주재 독일 대사인 오스카 트라우트만과 일본 주재 독일대사인 헤르베르트 폰 디르크센이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독일이 중재에 나선 것은, 독일에게 중국은 자신의 주요 무역동반자였고 (특히 군사물자), 그리고 일본이 중국에서 혼란에 빠지기 보다는, 일본이 소련에 위협을 가해주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10월 중순, 주중 독일대사 트라우트만은 장개석에게 협상 가능성을 물은 후, 주일대사인 디르크센에게 화해주선을 의뢰했다. 트라우트만 대사는 일본이 중국본토에 병력을 집중하면, 만주의 수비가 허술해지게 되고, 이것이 소련의 준동을 초래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뿐만 아니라, 만약 소만국경에서 일소간의 분쟁이 발생하게 되면, 일본은 양면작전으로 인해 불리해지게 되고, 반대로 소만국경에서 일본의 힘이 약해지면, 소련이 극동군을 유럽쪽으로 돌리게 되어, 독일이 위협받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 우려했던 것이다.


같은 해 10월, 일본정부의 유력인사들은 다음과 같은 협상안을 토론했다. 즉 일본이 중국의 본래의 영토적 행정적 상태를 다소간 인정해 주는 대신, 중국은 법적으로, 만주국을 승인하고, 내몽고의 친일본 체제를 인정하고, 중국정부와 인민의 모든 반일활동을 종식시킨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중일관계가 일본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조정되는 것이지만, 일중 합동 반공산당 작전은 중국 민족주의자들에게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이같은 안이 11월초에 트라우트만에게 비밀리에 전달되었고, 그는 이를 장개석 정권에 전했다. 장은 그의 답변을 한달간 끌었고, 그동안 일본에 대한 국제적 압력이 행사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같은 압력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자, 장은 이 제안을 협상의 원칙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그동안, 이같은 협상진행을 몰랐던 일본군은 남경에 대한 공세를 계속해나갔다. 그리고 일본군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즉각 보다 완강한 조건을 주장했고, 이것이 중국의 협상안 수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트라우트만과 일본의 신뢰성을 약화시켰다.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12월 13일 남경이 일본에게 함락되자, 일본은 이른바 <남경 대학살>을 자행했던 것이다. 이렇게, 일본측의 보다 가혹한 요구조건과 함께, 일본의 야만적 행동이 협상의 실패를 확실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협상은 1938년 1월 15일까지 진행되었다.


결국 트라우트만 중재안의 실패는 일본정책의 변화로 귀결되었다. 강경파 지도자들이 이제 사태를 장악하게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기 거부하는 장개석에 대해 분노했다. 1938년 1월 16일, 일본총리 고노에는 "국민정부를 상대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즉 국민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고, 장개석과 더이상의 거래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이후, 일본은 중국에서의 군사행동과 함께, 대안적 괴뢰정권 수립을 모색하게 된다.


이에 대해, <쇼와사>의 한도 가즈토시는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고 중국에 새로운 정권을 세워서 그 정권과 국교를 조정하자는 말입니다.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장개석과 반목하고 있는 왕조명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국민정부를 대신하는 괴뢰정권을 만들고 그 정권과 대화를 나누자는 것이었는데 정말이지 너무나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일본은 결국 전쟁에서 발을 빼지 못하고 점점 더 수렁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에도 다른 경로로 화평을 모색했다고 하나 중국이 더 이상 상대를 해주지 않아 전쟁을 계속해서 벌이게 됩니다."

참고문헌

소설 태평양전쟁,1984
Ian Dear, Michael Richard Daniell Foot, The Oxford companion to World War II, Oxford University Press, 2001
한즈 가즈토시, 쇼와사 1926-1945 전전편 1, 루비박스, 2010




덧글

  • dunkbear 2011/09/03 13:11 # 답글

    미친 NOM들이네요. 협상이 진행 중이면 군사작전도 비교적 느슨하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공세를 강화하고 남경 시민들까지 그렇게 학살했죠. 그런데
    도 상대가 협상을 받아들이거나 항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말이 되는 지...

    장개석을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양국 교섭/항복의 결렬을 장개석에게 뒤집
    어 씌우는 건 정말 꼴불견입니다. 저 모양이니 태평양에서도 깨졌지... ㅡ.ㅡ;;
  • 파리13구 2011/09/03 13:17 #

    일본군의 입장에서 보면,

    남경대학살은 "우리는 중국과의 협상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단호한 의지 표현이었다고 봅니다.
  • Nara 2011/09/03 14:16 #

    공세를 강화하는거야 협상 카드로 볼 수 있지만... 대학살은... -_-;;;
    군부에 정부가 끌려다닌 전형적인 예군요.
  • dunkbear 2011/09/03 16:18 #

    겁쟁이들이 약한 자들을 밟고는 그걸 단호한 의지라고 우기죠... ㅡ.ㅡ++
  • 파랑나리 2011/09/05 19:26 #

    dunkear//협상을 자기들이 파탄내놓고 장개석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운 것에서 오늘날에도 일본을 관통하는(위로는 천황부터 아래로는 2ch우익까지) 무책임이 엿보입니다.
  • 대공 2011/09/03 14:14 # 답글

    애초에 진행을 모르는데다가 뒤쪽이 빈다는 걸 신경도 안쓴걸 생각하면 역시 명불허전이라 해야할지...
  • 재팔 2011/09/03 20:19 # 답글

    애초에 남경 공략 자체가 중앙의 의사와 달리 현지 군이 진행했으니-_-. 한도 가즈토시는 일본 내에서 자타가 알아주는 해군빠인데, 남경대학살 관련하고 중일전쟁 관련해서 해군의 책임이 대두하기 시작한 걸알면 ㅋㅋ
  • 에드워디안 2011/09/05 13:28 #

    상해사변 당시에도 남경 공략론이 대두되었던 것을, 시라카와 대장이 견제했다지요?

    그 시라카와는 홍구공원에서 폭사당했고...-_-;
  • 행인1 2011/09/03 20:48 # 답글

    1945년이 되어 패전 직전이 되면 이러한 모습이 다시 나타납니다. 육군/해군/외무성이 따로따로 강화를 추진했다더군요.(같은 나라 맞는지...)
  • 파리13구 2011/09/03 21:04 #

    그렇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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