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윈스턴 처칠,전쟁 지도자 (6)... 유럽외교사

[대담]윈스턴 처칠,전쟁 지도자 (5)...





 

월간 역사- 처칠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 어떻게 전망하고 있었습니까?


레이놀즈- 그는 이번 상륙이 예상했던 결과를 달성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그는 새로운 덩케르크의 재앙을 두려워했고, 1차세계대전의 상처를 다시 떠올리고 있었고, 전면적이고 유혈적인 전투들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피하기를 희망했다. 이같은 이유들 때문에, 그는 독일과의 정면충돌을 기피했다. 우리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것처럼, 처칠은 독일에게 최후의 일격을 날리기 위해, 직접적으로 대치하기 전에, 독일을 약화시키고, 포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북아프리카 전투가 오랫동안 지연 교착상태에 있었다 : 알제리 와 모로코의 상륙은 194211월에 있었지만, 튀니지가 함락된 것은 19435월에 가서였다. 간헐적인 충돌은 그해 겨울까지 계속되었고, 따라서 1943년에 프랑스로 상륙한다는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연합국이 다음으로 공략한 곳은 이탈리아였고, 우선 시칠리아에서 상륙했고, 그 다음으로 반도에 상륙했던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도 원래 작전은 신속한 승리를 노리는 것이었다. 처칠은 미리 확보한 정보에 따라. 독일이 알프스산맥 쪽으로 빠르게 후퇴하면서, 이탈리아를 포기할 것이라 기대했다. 만약 이같은 시나리오가 실현되었다면, 이것은 연합군에게 큰 이점을 제공할 것이었고, 영국에서 폭격이 불가능했던, 독일 남부에 대한 폭격을 위한 비행기지들을 제공해 줄 것이었다. 이렇게 작전 구상은 단순하고,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로마를 방어하기로 결심하면서, 연합군에게 이탈리아는 곤경이 되었다. 유혈의 혼란스러운 충돌들이 1945년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강타했다. 밀라노가 해방된 것은 19454월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처칠은 북아프리카 와 이탈리아에서의 신속한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 하지만, 전황은 진창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았다. 미국은 영국총리가 지중해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되고, 처칠이 프랑스에서 싸울 생각이 없다고 추론하게 된다. 미국이 연합군의 전략적 작전 지휘권을 가지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미국은 1944년 노르망드 상륙작전 동안 지휘권을 행사하게 된다 : 이에 따라, 상륙작전에서 주력 부대를 제공한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만약 상륙작전이 1942년에 있었다면, 주력부대는 대영제국에서 제공했을 것이다. 1944년에 모든 것이 변했다. 미국이 프랑스에서의 작전을 지휘했고, 처칠은 이후 프랑스에서 진행되는 전투들에서 대부분 보조 참여자가 되었다.


바로 이같은 사실이 1945년의 얄타회담에도 영향을 주었다. 미국대통령의 이상주의에 반대하면서, 루스벨트에 반대하면서, 연합국들간의 균열을 드러내면서, 처칠은 대영제국의 영향력 상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2개의 초강대국이 지배하는 양극화된 세계의 출현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처칠은 프랑스에게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주고, 점령지 관할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는 처칠은 친프랑스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루스벨트가 유럽에서 평화가 회복되자마자 미군을 철수할 것이라 표명하자, 처칠과 이든은, 전통적인 대영제국의 외교원칙에 의거, 유럽에서의 소련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를 끌어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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