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윈스턴 처칠,전쟁 지도자 (1)... 유럽외교사



 

[윈스턴 처칠]


전쟁 지도자


역사가 데이비드 레이놀즈 David Reynolds 와의 대담


처칠은 제2차세계대전의 위대한 영웅임이 분명하다. 물론, 영국항공전에서 영국을 단결시키는데 성공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또한 전략적 혹은 적의 전력을 평가하는데 오류들을 범하기도 했다고 한다. 전쟁지도자 , 윈스턴 처칠에 대한 역사가 레이놀즈의 평가!


프랑스 파리 - 월간 <역사>

200911월 – 제347



역사 – 1940, 처칠이 대영제국의 총리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위대한 인간으로 간주되었습니까?


레이놀즈- 아니다. 대부분의 영국인들은 실패들로 점철된 그의 경력을 잊지않고 있었다. 처칠은 제1차세계대전의 다다넬스 작전의 참혹한 실패로 상당한 오명을 가지고 있었고, 1929년은 처칠에게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될 정치적 고립의 시작을 알리는 한 해가 되었다. 그는 당시를 뜨겁게 달군 치열한 논쟁들에서 안좋은 선택들을 했던 것이다. 그는 인도 독립에 반대했다 ; 그는 1936년 국왕교체로 귀결되는 왕위계승권 위기에서, 에드워드8세를 지지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정열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이 인간의 정치 생명이 끝장났다고 생각했다.


1930년대 동안 절치부심을 계속한 처칠은 운명반전을 위한 기회를 잡게된다. 영국군의 상태에 대해 우려를 하던, 몇몇 고위공무원들, 민간인들 그리고 군인들이 비밀리에 제공한 정보들을 통해, 처칠은 독일의 재무장에 대해 경고를 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는 영국이 결국 추진하게 된, 재무장 계획의 가속화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전쟁이 선포되었을 때, 이번 전쟁은 장기전이 될 것이라 전망되었고, 보수당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처칠을 자신의 내각에 기용하는 것 이외의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처칠은 193993, 해군장관에 기용된다.



역사- 1940510, 노르웨이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체임벌린이 사임하고, 처칠이 총리가 됩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전쟁경험이 풍부한 사람이었습니까?


레이놀즈- 그는 풍부한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서 수학했다. 기병장교로, 그는 1890년대말에 각종 제국주의 전쟁들에 참전했고, 특히 수단에서, 그는 아마도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1940, 이제 그가 전쟁 지도자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전 인생이 바로 이 순간을 위한 것이라는 감회에 젖기도 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비록 더이상 총리가 아니었지만, 보수당의 실질적의 지도자 였다. 처칠은 19405, 노동당 과 자유당을 포함하는, 연립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는 따라서 국민적 지도자의 준하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는 국방장관직도 겸직하고 있었다. 그는 실제로, 3군 참모총장들(육군,해군,공군)과의 직접 대면 논의를 원했고, 그들과 적용해야할 각종 전략들을 토론했다.


처칠은 자러가기를 원하는 참모본부 장교들과 심야회의를 자주 가졌다고 한다. 이같은 심야회의들은 당시 <윈스턴의 미친 밤들!>이라 불렸다. 앨런 브룩, 영국 육군참모총장은 처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 “비록 처칠은 내가 지금까지 만나 함께 일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까다로운 인물이기는 하지만,그와 일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은 이 지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라 생각한다."



역사- 이렇게, 1940510, 그는 총리가 되고, 바로 같은 날에, 히틀러가 서부전선에 총공세에 돌입하게 됩니다.


레이놀즈- 515, 그가 아직도 그의 정부 구성을 완료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그의 프랑스 인 동료 지도자인 폴 레노 가 아침 730분에 전화를 걸어왔다. 이 전화는 처칠이 전혀 환영할만 것이 아니었다 : 하지만 이 전화통화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될 것이었다. 프랑스 총리는 그에게 영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위 아 디피티드, 위 해브 로스트 더 배틀! We are defeated, we have lost the battle! 우리가 졌습니다. 우리가 전투에서 패했습니다! » : 당시 독일군은 디낭과 세당 부근에서, 뫼즈강을 방금 도하한 상황이었다. 처칠은 이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는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파리의 프랑스 외무부에서 가믈랭, 영불연합군 총사령관의 영접을 받았고, 가믈렝이 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처칠- 그는 이후 그의 전쟁회고록에 바로 이 날의 일을 매우 자세히 기록하게 될 것이었다- 그는 장군에게, 조악한 프랑스어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 «우 에 라 마스 드 마뇌브르?- 전술 예비부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 가믈랭은 영국인들이 전형적인 프랑스적인 방법으로 간주하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처칠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프랑스인들이 예비군을 전혀 보유하고 있지 못하다니!


처칠은 정신을 가다듬기 위해, 잠시동안 창문밖을 쳐다보았다 : “프랑스의 존경할 만한 고위 공무원들이” 문서보관소에서 문서상자들을 부지런히 나르고 있었고, 외무부 앞마당에 피운 거대한 불구덩이속에, 이들을 내던지고 있었다. 서부전선에서의 전투가 시작된 지 고작 6일만에, 처칠은 프랑스인들이 이미 전쟁 포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날의 장면은 그가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 장면은 처칠에게, 다음 시나리오를 떠올리게 만들 수 밖에 없었다 : 대영제국만이 홀로 싸우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 이 해 여름은 20세기 프랑스와 영국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이 될 것이었다.




덧글

  • 산왕 2011/04/05 16:14 # 답글

    잘 읽었습니다. 처칠에 대해 살펴볼 때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전쟁영웅이 된 덕에 그 전의 실책들은 대부분 잊혀지거나 덧칠되게 되었다는 점이었죠^^;
  • 파리13구 2011/04/05 16:19 #

    네, 총리직을 맡고 한동안, 처칠의 지위는 매우 불안했다고 합니다. ^^
  • 천마 2011/04/07 13:50 # 삭제 답글

    폴 레이노의 말은 처칠 회고록에도 나오는 유명한 말이죠. 개인적으로 그 사건은 프랑스가 얼마나 전쟁을 두려워했으며 전의가 낮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사실 5월15일 당시 독일군이 뫼즈강을 도하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프랑스군은 여전히 치열하게 저항하고 있었고 이후로도 독일군은 빠른 전진때문에 보병사단과 기갑사단간의 거리가 멀어져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보급문제도 있었서 길가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었다는 일화는 유명하죠)

    심지어 덩카르트철수 이후에도 75개사단이 넘는 병력을 보유하고 있어서 이기지는 못해도 시간을 끌면서 정부를 피난시키고 전쟁을 계속할 능력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독일군이 방어선돌파에 성공한 순간 (그것도 국가 지도자가) "전쟁에 졌다"며 절망하여 울부짖는 모습은 처칠 같은 리더가 왜 중요한지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 파리13구 2011/04/07 13:55 #

    네, 동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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