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영국의 유화가 독일의 불만만을 고조 시켰을까?" Le monde

전간기 영국-독일 관계를 보면... ^^





전간기 외교사를 읽다보니,

이해가 안가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것은 전간기, 영국의 유화정책과 그 효과에 관한 것이다. 왜 영국이 대독 유화에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측의 불만은 고조되었을까 라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갈등상황에서, 한쪽이 유화로 나오면, 상대방은 불만을 자제하는 쪽으로 나오는 것이 정상이라 한다고 볼때 말이다.

우선, 영국의 유화정책을 시작한 것은 네빌 체임벌린이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지도한 <로이드 조지> 였다는 점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종전 이후, 독일이 지나치게 약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던 영국은 유럽대륙에서의 독일 프랑스간의 세력균형을 회복할 수 있기를 원했고, 이것이 영국외교가 독일을 돕는다는 원칙의 명분이 되었다. 물론 이것이 영국이 전승국으로서의 이익을 포기했다는 것이 아니고, 베르사유 조약 자체를 부정했다는 것은 아니고, 다만 당시 영국의 우려란, 베르사유 체제가 지나치게 프랑스에게 유리하고, 독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우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사유 조약을 둘러싼 독일과 전승국들간의 갈등은 1918년부터 1923년 프랑스의 루르점령 때까지 계속되지만, 해를 거듭할 수록 확실해 지는 것이란, 갈수록 연합국이 독일을 힘으로 누르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물론 적어도 1921년까지, 대부분의 조약을 실력행사를 통해 관철시키는 것은 여전히 가능했다.

한편, 전승국이 베르사유 체제를 관철시키는 것이 점점 여러워지고 있었고, 독일인의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불만은 점점 고조되고 있었고, 이는 주로 <전쟁 배상금> 문제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일인의 불만의 원인인, 전후 독일의 빈곤은 배상금 때문이 아니라, 세계대전 때문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영국 외교가 로이드 조지 시절부터 대독 유화정책을 실시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을 고려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전쟁배상금은 계속 독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재협상되었다고 한다.

1925년 제1차 세계대전을 사실상 종결시키고, 독일 프랑스간의 세력균형을 도모하는 <로카르노 조약>이 체결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고, 이제 유럽에 <평화와 희망>의 시대가 개막될 것으로 보였다. 실제로 1929년말 독일의 대중적 외침은 "더이상의 전쟁은 안된다!"였다고 한다.

동시에, 전승국들의 대독 유화는 계속되었고, 1930년 연합국 군대가 라인란트로부터 철수한 것은 바로 그 맥락이었다. 하지만, 조약에 대한 독일의 불만이 가장 고조된 것은 바로 그 때였다.


결국,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상식적으로, 유화정책이란 불만을 가지고 있는 상대방을 달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전간기 동안, 영국외교가 꾸준히 독일에 대한 유화정책을 추진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불만은 고조되기만 했다. 매우 역설적인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가 된 1933년 1월, 베르사유 조약과 그 체제가 거의 유명무실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약에 대한 독일국민의 불만이 정치적으로 최고조에 달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바로 <히틀러>였다는 점이다.

이는 승전 연합국의 유화와 독일의 불만간의 기묘한 엇박자 였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고 생각된다.
결과적으로, 전간기 유화가 불만을 달랜 것이 아니라, 불만을 더욱 고조시켰다는 것이
당시 유화의 한계이자, 치명적 문제점이었다고 본다.


덧글

  • 행인1 2011/02/16 17:22 # 답글

    유화정책의 역설이로군요....-_-;;
  • 파리13구 2011/02/16 18:03 #

    네, 비극이었다고 봅니다...
  • nishi 2011/02/16 22:32 # 답글

    그래도 정확히 어떤 인과관계로 그렇게 독일의 불만이 커진 것인가 하는 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가요? 결국 전쟁을 마음먹었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답은
    충분치 않을까요?
  • 파리13구 2011/02/17 08:56 #

    네, 고민되는 문제입니다.

    적어도 29년까지 독일 다수 여론은 전쟁은 절대로 안된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하구요,

    그러면서도 한편, 이미 그 기능이 정지된,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은 높아만 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면, 영불이 대독 유화를 하던, 적대를 하던,

    독일은 어떻게든 베르사유 체제에 대한 불만을 키우지 않았을까 가정하게 되기도 합니다.
  • 천마 2011/02/17 17:18 # 삭제 답글

    경제상황과 관계있는 것 아니었을까요? 독일은 신흥공업국으로 세력을 확장하다가 1차대전으로 본토에 포탄한발 떨어진 경험없이 패배했습니다. 국민들은 패배를 실감할 수 없었죠. 그 후 혼란기를 거쳐 겨우 살만해졌는데 다시 대공황의 영향으로 간신히 다시 쌓아올린걸 잃게 됐습니다.

    더우기 독일의 경우 베르사이유체제는 강대국의 직위를 박탈당한 1차대전 패배의 상징입니다. 일반국민들에게 있어서 베르사이유체제가 유명무실해졌는지 로카르노조약이 어떤의미인지 알기는 어렵죠.

    완전히 개인적인 추측입니다만 패배를 실감하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있어서 강대국으로의 복귀라는 욕망이 강했을 것이고 그건 약간의 유화정책으로 만족할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나마 경제사정이 나았을때는 참을 만 했는데 경제가 어려워지자 그 박탈감과 분노가 기존의 베르사이유체제에 대한 적대의식과 겹쳐 이런 결과가 나타난거 아닌가 합니다.
  • 파리13구 2011/02/17 17:27 #

    네, 당시 독일인들이 자신의 패배 사실을 몰랐다는 점이 매우 골치아픈 문제였다고 합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패전국민들에게, 베르사유 조약에 대해 영국이 아무리 양보한들,
    독일인들이 만족할 수 없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독일은 전쟁에서 진 적이 없다! ^^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방문자

광고

2018 대표이글루_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