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동에서 본 체임벌린의 유화정책?" Le monde



네빌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을 동아시아의 관점에서 본다면 어떨까?

체임벌린은 1937년 5월에 영국 총리에 임명되었고,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중일전쟁을 도발한 것은 1937년 7월 7일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고 본다.

당시도 여전히 체임벌린이 통치하던 영국은 대영제국이었고, 제국의 총리라면 대외정책을 유럽만이 아니라, 전체 세계전략이라는 차원에서 구상하는 것이 정상일 것이다.

체임벌린 집권 2달 후 발생한, 중일전쟁 과 그의 유화정책이 관련있을 것이 추측된다.

만약 영국이 나치 독일과 유럽에서 대규모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영국은 유럽에서 뿐만아니라, 중국 등 동아시아에서 일본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동시에 견제해야만 하는 막중한 부담을 가지게 되고, 이는 당시 영국 상황에서 사실상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될 것이 분명했다고 본다.

역사가 테일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극동에서 점점 고조되는 일본의 압력으로, 영국은 유럽으로부터 도망치려 했다.

당시 유럽 상황과 극동의 상황을 이어주는 것이 분명히 있었다. 일본은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었고, 또한 그곳에서 외국, 특히 영국의 이익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보면, 영국은 일본을 견제하고, 중국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과의 관계를 끊거나, 최소한 유럽에서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아야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한편, 1939년 상황에서, 반코민테른 협정 체결 국가인 독일과 일본의 <영국>에 대한 시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테일러의 지적에 따르면, 독일은 영국의 어려움이 극동에서 커지기를 원했고, 일본은 영국의 어려움이 유럽에서 커지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즉 독일은 영국이 극동에서 일본과 충돌하기를, 반대로 일본은 영국이 유럽에서 독일과 충돌하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독일 과 일본간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었던 나라는 바로 <소련>이었다. 일본은 소련과 싸우는데 독일의 지원을 얻기를 원했다. 하지만 독일은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폴란드가 독일의 목표가 되자, 독일에게 소련은 중립국 혹은 심지어 동맹 대상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던 것이다. 1939년 8월 23일,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그렇다면, 독소불가침조약 체결 소식에 대한, 일본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한마디 날벼락이었다. 당시 노몬한에서 소련과 군사적 충돌이 한창이었던 일본은 대소련전에서 유리한 전략을 위해, 독일과의 군사동맹을 적극 검토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독일이 소련과 손을 잡았다는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이렇게, 리벤트로프-몰로토프 조약 체결과 함께, 일본은 외교적 파국, 고립무원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39년 일본은 노몬한 사건의 무대인 몽고,만주국 국경에서 소련에 대한 군사적 패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고, 같은 해, 8월 23일의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소식은 독일에게 외교적으로 배신당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오래전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한 일본에게, 소련과는 군사적 원수상태, 독일은 배신자이고, 중일전쟁으로 중국과도 군사적 충돌 상황 이었고, 여기에 미국 마저 1939년 7월 27일 <미일 통상항해조약>의 일방적 폐기를 통고함을 통해, 미국과 일본의 관계에서 좋은 시절은 이제 끝이라고 통보해온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영국 체임벌린의 입장에서 볼때, 영국 대독선전포고를 한 1939년 9월 3일 시점이면, 극동에서의 영국의 경쟁국인 일본외교가 <공황상태>였다는 것이 우연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즉 영국은 극동에서 일본이 혼란상태인 상태에서, 유럽에서 독일과 전쟁에 돌입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네빌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정책을 유럽적 차원이 아니라, 극동문제를 포함한 포함한 세계적 차원에서 본다면,
나름대로 당시 영국 상황에서, <최선이고, 확실하다고> 믿었던 정책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사료는 없지만 말이다. ^ ^




덧글

  • 에드워디안 2011/02/10 13:50 # 답글

    체임벌린의 전임 수상 볼드윈 경은 영국이 군사력으로나 경제력으로나 극동에서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는데 한계가 있다 생각했고(어느 정도는 사실이었음), 그래서 만주사변 이후에도 대일유화책을 시도하면서 그 대가로 양자강 이남의 영국이권을 보장받길 원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영일동맹을 다시 부활시키는 방안도 심각하게 논의되었지만, 일본에 대한 미국의 반감이 워낙 강했던 탓에 무산되고 말았다네요.

    한편 영국이 유럽에서 독일을 견제하거나 지중해-아프리카를 방위하는 것은 물론, 극동에서조차 일본을 견제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무솔리니가 이에 자신감을 얻어 에티오피아 침공을 강행할 수 있었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또한 30년대 중반 이후 이탈리아의 대일접근이 가속화되어, 결국 37년엔 反코민테른 협정에 가입하게 되었지요.
  • 에드워디안 2011/02/10 14:03 # 답글

    이탈리아의 대독-대일관계 강화에 따라 극동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은 더욱 위태롭게 되었는데, 이탈리아가 잠재적 적성국으로 부상한 이상 지중해와 수에즈 운하를 통해 싱가폴에 병력을 파견하여 일본에 맞선다는 전략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1937년 2월엔 영국군 수뇌장성들이 '우리가 이탈리아의 우호와 순종을 당연히 여길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지요.
  • 에드워디안 2011/02/10 14:09 # 답글

    여담이지만 히틀러는 일본의 중국침략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일본이 계속 장개석과 대결했다간 결과적으로 공산당(중공)의 세력만 키우게 될 것이라며 불만이었다고 합니다.ㅋ
  • 천마 2011/02/10 16:14 # 삭제

    1937년에 일본과 협정을 맺기전까지는 독일이 중국의 장개석을 지원했다는 것을 알았을때 참 기분이 묘하더군요.

    팔켄하우젠이나 폰 젝트 같은 인물들이 장개석군의 군사고문을 했고 Kal98k소총에 독일군복과 헬멧을 쓴 모습을 한 장개석군대 사진을 보면 중국군인지 독일군인지 혼동이 될 정도였습니다.

    중일전쟁때 독일군사고문에게 훈련받았던 정예병력들이 일본군에게 큰피해를 줬지만 소수정예인 이들이 소모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에게 이득이 되버렸으니 히틀러의 불만이 맞은 셈이네요.
  • 파리13구 2011/02/10 21:33 #

    에드워드안 님, 천마 님//

    흥미로운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 ^
  • 까마귀옹 2011/02/10 16:03 # 답글

    그렇다면 처칠은 체임벌린에게 이렇게 말했겠죠.

    '체임벌린 경.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 히틀러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히틀러가 아니야!'

    (이거 입에 딱딱 붙는네용)
  • 파리13구 2011/02/10 21:33 #

    ^^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방문자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