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탈린그라드]소련이 승리한 이유는? (1) Le monde



« 왜 소련이 전투에서 이겼을까 ? »

 

스탈린의 전략적인 실수들로 인해 취약했던, 소련군이 어떻게 스탈린그라드에서 승리할 수 있었을까 ? 소련 선전당국이 주도했던 애국심 고취가 힘을 발휘했던 것인가 ?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소련의 집단적 저항이 초래한 경제적,인적 결과는 무엇이었나 ? 최근의 문서보관소 관련 기록의 공개 덕분에, 지금까지 금기시되어온, 이 같은 주제들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프랑스 파리 - 월간 <역사> 20012월호 252

 

니콜라 베르트

Nicolas Werth

 

 

1941-1945년 동안의 역사를 그 동안 역사가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취급해왔다. 하지만 최근 이용 가능한 관련 기록들이 대거 공개되면서, 매우 대조적이고, 역설적이었던 이 시기에 대한, 많은 다채로운 연구들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신화와 금기를 넘어 이 시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왜 소련이 나치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1.나치의 전광석화와 같은 성공

 

1941 9 6, 소련공산당 모스크바 지역당의 교육과 조직 책임자인 니콜라이 미하일로프  Nikolai Mikhailov 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 수도의 거의 모든 작업장들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이 위협적이고, 선동적인 소문들을 유포하고 있다. 노비코프 동무가 우리에게 고발해 온 바에 따르면, 39번 창고에서, 한 노동자가 그에게 <라디오에서 전선소식에 대해 뭐라고 했습니까 ? »라고 질문했다. 노비코프 동지가 그에게 파스스트들이 민간인들과 붉은 군대 부상병들에게 자행한 만행들을 이야기 하니, 한 노동자가 여러 노동자들 앞에서 말하길, « 야만적인 놈들은 파시스트가 아니다. 바로 여러분 공산주의자들이 야만적이다. 조만간 그들이 당신들에게 복수를 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최근에 부분적으로 비밀이 해제된 많은 <후방 상황에 관한 보고서>들에서 확인되는 <패배주의적 소문들>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을까 ? 보다 폭넓은 연구가 부재한 상황에서, 독소전쟁 초기 몇 달 동안의 패주에 대한 소련 인민들의 반응이 어떤 것이었는지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 번째 역설을 보여준다 : 소련 사회가 심리적으로 전쟁에 준비된 상태에 있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소련인들은 1941년 여름의 군사적 재앙의 규모에 매우 당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930년대 동안, <전쟁 위기>, <자본주의에 의한 포위>, 소련이 <포위된 요새>라는 주제들이 당국의 선전의 핵심이었고, 소련의 사회와 경제를 빠르게 변모시켜야 만 한다는 폭력적 정치를 정당화하는 원칙이었다. 강제력을 동원해서라도, 소련은 현대화되어야 하고, 이는 결국 <패배한 러시아 증후군>을 치유하기 위해서라는 것이고, 이는 스탈린이 1931 2 4일에 한 유명한 연설에서 표명한 논리였다.

 

«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 뒤떨어진 까닭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지방장관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패한 것은 바로 뒤떨어졌기 때문입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졌습니다.

문화적으로 뒤떨어졌습니다.

국가적으로 뒤떨어졌습니다.

산업적으로 뒤떨어졌습니다.

농업적으로 뒤떨어졌습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패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것이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 스탈린

 

<나의 조국 러시아여!>1931, 산업 관리와 경영자 협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사실, 소련 사회는 1941 6 22일 이전부터, <동원된> 사회였다. 그리고 이는 군사적 측면에서만 동원된 사회가 아니었다.  1940 6, 8월 그리고 10월에, 일련의 긴급명령들은 <노동 동원> 과 각종 반사회적 활동을 처벌할 것을 규정한 바 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자신의 의사에 따라 일자리를 바꿀 수 없게 되었고, 당의 결정에 따라,그들은 어느 때라도 소련내의 어느 지역의 어느 공장으로 전출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되었다.

 

일자리를 거부하는 모든 행위가 <탈영>으로 간주되었다 ; 이유 없는 결근, 20분 이상의 지각 등은 사법처리 절차를 각오해야 하는 행동이 되었다. 이렇게, 주당 노동시간은 일주일에 48시간을 넘어서게 되었다. 소련의 당시 산업 현실에서 불가피했던 불량품 생산 과 작업장에서의 절도는 강제수용소 3년 강제 노동형에 해당되는 범죄로 간주되었다.

 

1940 7월부터 1941 6월까지 약 1년 동안, 15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이 같은 <사악한 법>을 위반한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 같은 처벌은 특히 인기가 없었고, 관련된 불만은 독일의 침공 직전에 특히 고조된 상태였으며, 이것이 소련 사회와 체제간의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었다.

 

소련당국이 독일 <전격전>의 번개 같은 성공 소식들을 체계적으로 최소화하려 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였고, 침묵을 강요 받게 되었다.  후방의 소련 국민들은 정부의 공식 발표로 만족해야만 했고, 각 인민들은 <행간을 읽기>위해 노력했고, 지난 수년 동안 축적된 불만을 반영하는 각종 소문들이 나돌았다. 독소전쟁 초기 몇 주 동안, 지방에서 가장 널리 유포된 소문들 중 하나는, 특히 우크라이나 와 침략자들에게 가장 널리 노출된 소련 서부 지역에서 유포된 소문은 <집단농장>의 즉각적 해체와 관련된 것이었다 : 소문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농민들이 집단농장에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고 있으며, 가축을 소유하는 것도 허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독일인들이 괴롭히는 것은 <권력자들, 공산당원 그리고 유대인들> 뿐이라는 것이다. 후퇴 와 피난의 혼란 속에서, 전방에서 가까운 많은 집단농장들이 공개적으로 <해체>를 선언하기도 했다.

 

전쟁 초기 몇 달 동안의 모스크바 인민들의 <정신상태>에 관한, 최근에 공개된 한 기록은 독일이 진격함에 따라, 주민들이 동요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수도 주민들은 세가지 부류로 분류되었다 : <애국자들>, <기회주의자들> - 이들이 다수였고, 모든 소문들에 민감한 사람들, 그리고 <불평불만분자들>. 이들은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고, 독일이 소련을 쓸어버릴 것이고, 독일이 모든 사람들을 위해 <유대인과 볼셰비키>들을 제거해 줄 것이라 믿고 있는 자들이었다.

 

소련인민의 애국적 저항 정신이 고조되기 시작한 것은 1941 9월말 과 10월초 였던 것으로 보이고, 이는 적군이 수도에 접근해 오고, 나치의 야만에 대한 소식들이 널리 확산됨에 따라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의미심장한 것은, 인민들이 <파시스트 짐승>에 관한 당국의 공식 선전 보다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나치의 야만에 관한 소문들에 더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41 10 13-15, 독일군의 전위부대가 모스크바 외각에 도달함에 따라, 많은 공산당 지도자들과 노멘크라툴라들이 수도를 떠났다. 하지만, 많은 모스크바 시민들은 공황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수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스탈린의 결심이 이들의 태도에 영향을 준 것이었을까 ?

 

한가지 점만은 확실했다 : 특권층에 대한 대중적인 불만 과 몇몇 지도자들의 비겁함에 대한 불만이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1941 11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 동안, <패배주의>가 대세였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독일 <전격전>의 실패로 귀결되었고, 이것이 동부전선에서의 첫 번째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덧글

  • 들꽃향기 2011/01/28 11:55 # 답글

    말씀대로 2차대전 내내 러시아국민들이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은 것이 신기하기도 합니다. 특히 독일군에 포위되어 모든 지원과 보급이 차단된 군대들조차도 대체로 계속해서 저항을 해서 독일 장성들을 놀라게 했다고 하니 말이죠. ㄷㄷ
  • 파리13구 2011/01/28 11:57 #

    스탈린주의자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모두 강철의 원수님 덕분 아니겠습니까? ㅋㅋ
  • Cicero 2011/01/28 12:15 #

    적백내전시기에 이미 그런식의 보급이 차단되고 승리를 장담할수 없는 상태에서 버티기 전투에 익숙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더군요.
  • 파리13구 2011/01/28 12:19 #

    Cicero 님/

    그렇군요. 아무튼, 스탈린 체제에 대한 소련인민들의 불만이 고조된 상황에서 시작된 독소전쟁에서, 소련인들이 패배주의에 물들지 않고, 스탈린에 대한 불만 혹은 저항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흥미로운 역사라고 생각됩니다.
  • 행인1 2011/01/28 12:39 # 답글

    사실 차르시절(특히 1차대전)부터 후퇴하거나 항복하는 이의 남은 가족들이 어찌된다는게 잘 알려져서 그런걸수도...
  • 파리13구 2011/01/28 12:47 #

    네, 그럴수도 있지만, 개전초기 엄청난 수의 소련군 포로가 발생한 상황을 적절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 팬져곰 2011/01/28 14:06 # 답글

    정신력도 중요한 요소지만 정신력만으론 모든게 설명되진 않죠.
    독일의 타이푼작전 실패의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소로 라스푸치나와 대추위라는 평가가 아직까진 주된 요소지요
  • 파리13구 2011/01/28 14:09 #

    그렇습니다... 정신력만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정신승리>밖에 없습니다. ㅋㅋ
  • 에드워디안 2011/01/28 15:23 # 답글

    모스크바가 함락 위기에 처해졌음에도 스탈린은 계속 크레믈린에 남아있었죠. 절망적인 상황에 거의 노이로제에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 사수'를 결의하며 사기를 북돋운 것은 평가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훗날 스탈린이 사망한지도 수년이 더 지나 주코프는 이렇게 말했다죠.

    '승리는 병사들과 장교들의 의지에 힘입은 바 컸다. 반드시 이긴다는 의지가 모두의 사기를 높였다. 나는 스탈린이 최고사령관으로서 가장 큰 공헌을 했다고 인정한다.'
  • 파리13구 2011/01/28 15:25 #

    네, 역시, 강철의 대원수가 대조국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높이 평가할 부분이 한두개가 아니라 봅니다.

    물론, 여러 한계가 있었지만 말입니다. ^^
  • 저녁 달빛 2011/01/28 19:48 # 답글

    악랄한 것을 비교 하면,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한수 위였고....
    시대는 러시아에서 그런 미친 지도자가 필요한 시기였습니다.
    스탈린이 끝까지 모스크바에 남아 있었다는 것을 높히 평가 할수도 있지만.....

    사실 모스크바에서 달아난다 하더라도 스탈린이 어디로 갈수 있었는지도 의문이죠.
    다른 나라처럼 망명 정부를 세울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최근 장하준 교수의 책에서
    초기 스탈린의 무리한 정책 중.
    농업 생산량을 고려 하지 않은 무리한 공업화를 예로 들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우습게도
    그런 불균형적인 경제 정책이
    정작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에게는 이득으로 돌아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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