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학자 워렌 코헨에 따르면
바로 타이완의 장제스 였다고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 내전에서의 공산당의 승리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파국은 아니었다. 아직 중국은 약해서 미국을 위협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미국은 중국 공산당이 애국심이 강해서 , 공산주의 중국이 소련의 꼭두각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948년, 마오쩌둥 군대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미국의 애치슨은 중국이 소련의 동맹이 되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 공산주의자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물론 1950년초에 중소협정이 체결되자, 미국은 실망했다. 하지만, 미국은 스탈린이 중국에게 가혹한 협정을 맺은 것이라 판단. 두 나라를 이간질 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심지어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도, 워싱턴 과 베이징 간의 협상을 줄기차게 진행했다.
타협의 일부로, 미국은 장제스 정권이 타이완을 포기하는 것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메세지를 중국측에 보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미국의 안보에 필수적이라 판단하는 지역을 포괄하는 방어선, 즉 애치슨 라인에서, 타이완이나 아시아 대륙의 어느 부분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1949년말 과 1950년초에 미국은 중국 공산주의자에게 타이완을 넘길 용의가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다시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중국과 미국은 적이 되었고, 따라서 이로 인한 최대 수혜자는 장제스였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중국 인민해방군은 1951년 타이완을 침공했을 것이고, 아마도 미국의 개입이 없는 가운데, 중국은 타이완 섬을 손쉽게 점령했을 지도 모른다.
출처-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바로 타이완의 장제스 였다고 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중국 내전에서의 공산당의 승리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파국은 아니었다. 아직 중국은 약해서 미국을 위협할 수 없다고 보았다. 미국은 중국 공산당이 애국심이 강해서 , 공산주의 중국이 소련의 꼭두각시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948년, 마오쩌둥 군대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미국의 애치슨은 중국이 소련의 동맹이 되는 것을 막는 수단으로 공산주의자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물론 1950년초에 중소협정이 체결되자, 미국은 실망했다. 하지만, 미국은 스탈린이 중국에게 가혹한 협정을 맺은 것이라 판단. 두 나라를 이간질 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심지어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당시에도, 워싱턴 과 베이징 간의 협상을 줄기차게 진행했다.
타협의 일부로, 미국은 장제스 정권이 타이완을 포기하는 것을 용인할 수도 있다는 메세지를 중국측에 보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 미국의 안보에 필수적이라 판단하는 지역을 포괄하는 방어선, 즉 애치슨 라인에서, 타이완이나 아시아 대륙의 어느 부분도 포함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1949년말 과 1950년초에 미국은 중국 공산주의자에게 타이완을 넘길 용의가 있었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다시 장제스 정권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중국과 미국은 적이 되었고, 따라서 이로 인한 최대 수혜자는 장제스였다는 것이다.
만약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중국 인민해방군은 1951년 타이완을 침공했을 것이고, 아마도 미국의 개입이 없는 가운데, 중국은 타이완 섬을 손쉽게 점령했을 지도 모른다.
출처- <미국은 동아시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덧글
아들이 굳이 혁명원로들의 만류에도 참전한 이유도 '인정받기 위해'서였다고 '모택동의 사생활'의 저자 리즈수이가 증언하기도 했고..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이었던 펑더화이도 대만이 급선무이고, 한국전쟁 참전반대파였지만 결국 모택동 개인의 판단과 압력으로 임무를 떠맡았지요..
저우언라이, 류샤오지, 덩샤오핑 등 후일 '문화대혁명'의 공격대상으로 비참한 죽음이나 망명생활을 해야 했던 이들이 모두 참전반대파였고, 펑더화이도 나중에 호되게 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마오쩌둥으로서는 주덕 등을 비롯해 혁명경력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들이 즐비한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내각에서의 입지강화를 위해 반대파를 가려내는 시금석으로 한국전쟁 참전을 결정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으리라 사료됩니다..
가장 큰 희생이 치뤄진 전투에서는 주로 국민당군 투항파들과 만주군관학교 출신들을 앞장 세웠는데, 이들의 '사상전향'을 믿지 않던 마오로써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한국전쟁에서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결론적으로 장제스, 마오쩌둥 모두 제 나름대로 최대의 수혜자라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