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체크포인트 찰리 위기, 1961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

1961년 여름 과 가을, 케네디 와 흐루쇼프는 베를린에서 충돌했다.

그리고 이같은 충돌의 정점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베를린 체크포인트 찰리 위기 였다.


1961년 10월, 케네디는 서베를린 감독관으로 루시어스 클레이 퇴역 장군을 지명했다. 장군은 베를린 위기를 고조시켜서, 미국이 소련에 승리하기를 원했다. 8월, 흐루쇼프는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했고, 이로 인해 서독으로 탈출하던 동독 주민의 대량 탈주 현상은 막을 내렸다. 클레이가 비밀리에 베를린 장벽 파괴를 구상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이었다.

클레이는 앨버트 왓슨 소령에게 , 숲 속에 베를린 장벽 복제품을 만들어 탱크와 불도저로 장벽을 공격하는 훈련을 지시했다. 이에, 유럽 주재 미군 사령관, 브루스 클라크가 이 훈련을 제지했고, 클레이는 이에 굴복했다.

하지만, 이러한 클레이의 계획은 소련 간첩을 통해, 흐루쇼프에게 보고 되었고, 이에 소련 지도부는 미군의 베를린 장벽 공격 시나리아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케네디가 이런 공격을 승인했는지 의심했다고 한다.

한편, 클레이는 순진한 철없는 젊은 대통령이 전쟁 없이도 승리할 수 믿는 것으로 보였고, 정말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보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으며, 10월 베를린 장벽 논란이 제기되자, 이를 기화로 장벽 철거를 위한 행동에 나서게 되었다.

1961년 10월 27일, 미국의 M-48 탱크 10대가 불도저를 앞세우고, 베를린 방벽의 중앙인 체크포인트 찰리로 밀고 올라왔다. 그곳에는 소련 탱크 10대가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루쇼프와 그의 참모들은 미리 준비했던 대책을 바로 실천에 옮겼다. 20대가 넘는 소련 탱크가 증원되었고, 미 동맹국에서도 비슷한 수의 탱크가 움직였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 탱크가 서로 총구를 겨누고, 밤새 16시간 동안 대치했던 것이다.

이후, 당시 흐루쇼프의 외교고문이었던 밸런틴 팔린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만약 미국 탱크와 불도저가 조금 만 더 전진했더라면, 소련 탱크가 발포했을 것이다. 당시 미국과 소련은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에 근접해 있었던 것이다."

이에 놀란 케네디가 클레이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제지했고, 다른 한편, 대통령은 비공식 채널을 통해 소련의 흐루쇼프에게 긴급 메세지를 보냈다. 로버트 케네디가 소련측의 조르지 볼샤코프와 접촉, 만약 흐루쇼프가 24시간 안에 탱크를 철수시킨다면, 케네디도 30분 이내에 탱크를 철수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은 클레이의 미국 귀국을 명령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소련 탱크가 물러났고, 미국 탱크도 약속대로 30분 사이 철수했다. 이렇게 찰리포인트 위기가 종료되었다.

이후 루시어스 클레이는, 자신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리려고 할때, 케네디가 핵무기를 사용했었더라면 하고 아쉬어했다고 한다.  


덧글

  • 텐구 2018/07/28 05:37 # 답글

    뭔가 군인중에 저런사람들이 좀 있는듯. 특히 저시대 저세대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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