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위기 3일차, 미국당국자들의 논의들...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위기 2일차,미국당국자들의 논의들...




 

쿠바위기 3일차, 미국당국자들의 논의들...


19621018일 목요일


목요일 아침까지,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에 대한 전면적 공습이 최선의 방안이라 여전히 믿었다. 아침 회의에서, 참모들이 해상봉쇄의 장점들에 대해 논의할 때도, 그는 이에 회의적이었다. 그는 이 방법으로는, 쿠바에 이미 배치된 핵미사일들을 제거할 수도 없고, 이것이 흐루쇼프로 하여금 베를린 점령을 자극시킬지도 모른다고 보았다. 즉 “해상봉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전면적 공습이 침공보다는 더 좋은 방안이라 생각했다. 침공시, 수천명의 미국인들이 쿠바에서 사망할 수도 있고, 침공은 공습보다 더 난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반면, 공습은 빠르고, 결정적이며, 기습을 <기정 사실>로 만들 수 있었고, 흐루쇼프가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의 대안이 없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로버트 케네디는 해상봉쇄론을 지지했다. 즉 쿠바 미사일 위기 첫째주 동안, 그는 전면 공격을 주장하는 매파들에 맞서, 봉쇄론자들의 논점을 주도했다. 또한 전직 소련 주재 미국대사, 류엘린 톰슨 도 이날 회의에서 봉쇄론을 지지했다. 그리고 케네디 대통령이 자리를 비운, 오후 회의를 주도한,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도 봉쇄론 주창자였다. 이렇게, 이 날 회의에서, 톰슨,맥나마라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 등이 봉쇄론을 옹호했다.


목요일 회의에서 주목되는 것은, 대통령과 그 참모들이 위기의 초기상황인 바로 이 순간, 터키에서의 미사일 배치의 전략적 유효함에 대해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로버트 케네디는, 소련측이 쿠바 와 터키의 미사일간의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점을 주장할 가능성을 제기했고, 이에 케네디 대통령 과 톰슨, 맥나마라는 터키 미사일 철수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 편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18일 회의에서는 또한 많은 미국 관료들이 쿠바에서의 미사일 제거 뿐만아니라, 피델 카스트로 제거가 미국의 최상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톰슨은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로 인한 압박을 통해, 카스트로 몰락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이에 로버트 케네디는 봉쇄만으로 카스트로를 제거할 수 있다는 전망에 회의적이었지만, 쿠바 지도자의 제거가 미국의 목표라는 점에는 인식을 같이했다.


이 날의 회의는 또한 다가오는 11월 중간선거도 주요 문제라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케네디 비판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위기 당시, 미국 행정부의 주요 관심은 대외정책의 승리를 통해 다가오는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것이었다는 분석은 근거가 희박하다. 아무튼, 중간선거가 케네디 행정부의 위기시의 판단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는 근거는 인상적이지 못하다.


목요일 아침 회의의 주요의제는, 해상봉쇄 와 공습의 장점들에 대한 쟁점 토론이었다. 맥콘,테일러,애치슨 같은 군사행동 지지자들은 해상봉쇄가 무용하다는 점을 계속 강조했다. 즉 그들은 봉쇄를 통해, 쿠바로 추가로 소련 미사일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는 있지만, 이미 쿠바에 배치된 미사일을 제거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직접적인 군사 공격만이 제거 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안이라는 주장이었다. 뿐만아니라, 미사일이 미국 본토를 향해 발사준비상태가 완료되기 전에, 신속하게 공격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테일러 합참의장은 쿠바 침공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나머지 다른 매파들은 신속한 공습을 지지했다.



반면, 해방봉쇄 지지자들에게, 그들이 주요 관심은, 만약 케네디가 쿠바에 대한 공격을 명령한다면, 흐루쇼프측의 대응이 더욱 심각한 것이 될 개연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침공 혹은 폭격과 다르게, 쿠바 해상봉쇄는 이후의 다른 대안들 실시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것이 협상이든 군사적 조치가 되든지 간에 말이다.


한편, 케네디 대통령은 국가안전보장회의 행정위원회 회의의 외부인사들에게도 자문을 구했다. 하지만 역시가 조언들에도 의견이 불일치가 존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령, 애치슨은 기습적 공습을 진주만 사건과 비교하는 것은 오류다는 점을 강조했고, <공습>만이 최선이다라고 조언했다. 이에 반해, 전직 국방부 장관인 로버트 로베트는 <봉쇄>가 더욱 안전한 도박이라고 조언했다. <봉쇄>는 침공 혹은 공습과는 달리, 소련측의 군사적 대응이 예상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 외무부장관인 안드레이 그로미코 와의 면담이 예정되어 있었다. 역시, 케네디와 만난, 그로미코는 기존의 소련 주장을 그대로 반복했고, 즉 소련의 쿠바에 대한 무기 제공은 쿠바 방어를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케네디는 대통령 집무실 책상 제일 위 서랍에 있는, 소련의 쿠바 미사일 사진을 소련 외무부 장관의 코앞에 내밀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이를 참았다. 다만, 그에게, « 우리도 소련이 제공한 무기가 방어적이라 추정하고 있고, 쿠바에 대한 침공도 해상봉쇄도 고려하고 있지 않고 있으지만, 만약 소련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경우, 종전 이후 가장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게 될 것”이라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 순간까지, 케네디는 <공습>이 최선의 방안이라고 믿었지만, 18일이 저물어 가면서, 그의 입장은 극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우선 오후에 있었던, 애치슨 과의 면담 과정에서, 전직 국무부 장관이 쿠바 침공을 <진주만 기습>에 비유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지적에 관심을 나타냈고, 쿠바 침공이 사실상의 진주만 기습과 같은 불명예가 있다는 점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저녁의 토론과정에서, <봉쇄>에 대한 대통령의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봉쇄>론자들이 토론의 주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공습>에 대한 그의 지지를 철회하면서, 대통령은 <봉쇄>론자들의 논거들에 의해 동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 해상봉쇄를 하면, 흐루쇼프가 군사적으로 대응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그런 만큼, 소련이 베를린에서 도발할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판단이었다. 뿐만아니라, 미국이 <진주만> 스타일의 기습 공격을 할 때, 미국이 받게 될 것으로 보이는 <무뢰한>이미지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고, <해상봉쇄> 이후에도, 공습,침공,외교 등의 대안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장점도 있었다.


또한 중요했던 것은 케네디가 피그만 침공 실패로부터 배운 교훈이었다. 대통령은 19614월의 피그만 침공 실패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당시 피그만 침공을 기획한 군부, 정보부 관련자들이 쿠바 위기 당시에도 매파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수 밖에 없었고, 이번 위기에서도, 그들의 판단이 오류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그는 피그만 사건의 경험을 통해
, 군부 및 정보당국의 주장에 놀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군사 문제에서 그들도 틀릴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고, 민간 참모들의 견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대통령 임기 초반의 강경일변도 대외정책 선호 경향을 스스로 버리고, 여러 조언들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혜안을 가지게 되었고, 이것이 바로 쿠바 미사일 위기 첫째주 동안의 케네디 대통령의 주요 관심사안이 되었다.


이렇게, 18일 밤, 케네디 대통령은 <봉쇄>론을 선호하면서, 기존 입장을 버렸다. 그리고 이후 3일 동안의 논의는, 봉쇄론이 잠정적인 결론에서, 명확한 쿠바 봉쇄 실시로 실천되는 과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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