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패배와 제3공화국의 붕괴(3) 레지스탕스

프랑스 패배와 제3공화국의 붕괴(2)




 

<찬성 569 대 반대 80>


마실리아호에 승선한 의원들은 1940년의 두번째 정치 드라마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다 : 페탱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표결! 이 투표는 비시의 카지노에서 실시되었고, 바로 이 도시로 당시 정부가 피신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며, 보르도는 휴전협정이 규정하는 점령지역에 속해 있었다. 물론 휴전협정이 프랑스에서의 정치 체제 변화를 강요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620일의 연설에서, 페탱은 프랑스의 패배가 도취감이 희생정신을 마비시킨 탓이라 설명했다. 프랑스에 <새로운 질서>가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이미 휴전 논의 과정에서도 드러났지만, 프랑스의 고통과 치유가 상호 관련이 있다는 것이 명백해 보였다. 패배를 원하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이 패배를 프랑스를 갱생시킬 수 있는 계기로 보았다. 이는 당시 극우파, <악시옹 프랑세즈>의 대표, 샤를 모라가 주장했던 것처럼 <신성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공화제에 불만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이 절망적인 기회를 공화제에 대한 복수의 기회로 삼았다. 19407, 리옹의 젤리에 추기경의 발언도 이같은 맥락에서 였다. "만약 승리했다면, 우리는 아마도 우리들의 오류들을 방치한 채 살아야만 했을 지도 모른다"


의회에서, 페탱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작전에 선봉에 선 것은 바로 피에르 라발이었다. 라발은 역설적이게도 제3공화국의 늙은 베테랑 정치인이었지만, 그는 항상 전쟁에 반대했다. 특히그는 1936, 좌파 인민전선에 의해 권력으로부터 추방된 것을 잊지 않고 있었다. "1936년에, 의회가 나를 토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은 내가 의회를 토하게 만들겠다."라고 라발이 19407월에 발언했다. 그리고 710, 찬성 569 대 반대 80으로 페탱에게 전권이 이양되었다.


이러한 압도적 다수의 지지는 부분적으로 반대표를 던졌을 의원들, 즉 마실리아 호에 승선한 의원들이 투표에 참가하지 못해서 였고,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배제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1939926, 소련의 폴란드 침공 이후 불법화되었던 ,프랑스공산당은 1940120일에 자신의 의석을 모두 상실했지만, 14명의 공산당 출신 의원들이 1939128일 프랑스 인민 연합을 결성해서 그 명맥을 이러나갔다. 하지만, 3명의 의원만 반대하고, 나머지 8명의 의원들은 페텡 원수를 지지하는 표결을 했다.


전직 총리, 레옹 블룸은 반대 표결한 80명의 의원들 중 한명이었고, 당시 의원들이 베강 장군에 대한 공포에 질려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 증언에 대한 해석으로 의견을 달리하고 있지만, 당시 의원들이 <비시 체제>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확신한 상태에서 찬성표결했다고 믿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당시 <비시 체제>의 미래가 오리무중이었던 것이다. 본질적으로, 압도적 찬성표결은 차라리 페탱에 대한 신임 투표였다고 볼 수 있고, 당시까지 페탱은 베강 장군과는 달리, 매우 꼴통스러운? 우파 로 간주되지 않았다.



<프랑스 제3공화국의 비명>


페탱에게 전권을 위임하기로 한 표결은 공화국 제도에 대한 믿음의 심각한 붕괴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패배에서 태어난 절망의 산물이었고, 이것 자체가 정치 체제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같은 정서는 휴전반대파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던 것이었다. 레지스탕스 와 자유프랑스 조차도 제3공화국의 난맥상에 반대하던 비시에 비해 덜 비판적인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전간기 동안, 3공화국에서 모든 것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 공화국은 내각의 불안정성으로부터 고통을 받았고, 정치의 양극화, 그리고 프랑스 국민이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참화때문에 약화되었다는 정서에서 나온 평화주의 등으로 인해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는 1930년대의 경제위기로 인해 최악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선전포고 이후에도, 1914년에 그랬던 것같은 , 국내 정치세력의 <신성한 동맹> 같은 것은 추진되지 않았고,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 우선, 19398월의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대다수 우파들은 이 전쟁을 파시즘에 대항하는 십자군 전쟁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선전포고 이후에도, 프랑스 정치에서 정쟁이 계속된 것은 바로 이같은 상황에서 였다 ; 19403, 달라디에 정부가 붕괴한 것은, 이 정부에 대한 자연적 동맹세력이 달라디에에 대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가령, 라발은 전쟁에 반대했고, 다른 우파들은 총리가 충분한 열의를 가지고 전쟁을 준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달라디에를 비난했던 것이다.




덧글

  • BeNihill 2010/10/24 17:52 # 답글

    각자 나름 심각하고 이유가 있어서 저랬겠지만
    나라가 개발살이 났는데 모여 앉아서 한다는 생각들이...
    (설마 나치 아래서 그런게 가능하리라고 생각한...건가?)
  • 파리13구 2010/10/24 18:12 #

    ^ ^
  • 에드워디안 2010/10/24 17:58 # 답글

    망해가는 집의 상황이 어떤지를 여실 없이 보여준 말기의 제3공화국이었습니다...

    다만, 1차대전이 프랑스의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안긴 건 사실입니다. 전쟁으로 전체 남성 인구 중 10%이상이 사망했고, 북부의 농업지대가 황폐화되었으며, 전시 와중에 발생한 인플레이션은 2차대전 발발시까지 프랑스 경제를 괴롭히게 되었죠(1919년부터 48년까지 도매 물가가 무려 105배나 상승). 인플레의 영향으로 저축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인구 증가율이 급격히 감소했고, 이에 비례하여 고령화가 사회 문제로 대두하였는데 1936년 통계에 따르면, 세계에서 60세 이상의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의 투자 의욕 또한 크게 위축되어 기술 발전은 사실상 정체되었고, '사로 플랜'이라 불린 해외 식민지 개발도 유야무야되고 말았죠. 이런 상황에서,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이 염전 증상에 빠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겁니다.
  • 파리13구 2010/10/24 18:13 #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 행인1 2010/10/24 19:17 # 답글

    라발이 이때부터 비시 정권의 전면에 등장했군요.
  • 파리13구 2010/10/25 08:29 #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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