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패배와 제3공화국의 붕괴(2) 레지스탕스

프랑스 패배와 제3공화국의 붕괴(1)




 

<폴 레노 미스테리>


위기는 616일 보르도에서 종결되었다. 국무회의가 아침에 소집되었다; 당시 부총리였던 페탱이 만약 휴전이 요청되지 않는다면,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정오 경, 런던이 프랑스 함대가 즉시 영국 항구로 인도된다는 조건하에, 휴전 교섭에 동의한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혼란이 극에 달한 가운데, 2시간 후, 이 전문이 부정되고, 영국측이 특이한 제안을 해왔다 : 영불합병을 통한 양국의 결합! 이 생각은 레노 총리의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해 제안된 것이었지만, 역효과만을 초래하고 말았다. "누가 시체와 합체되기를 원할까?"라고 페탱이 호통을 쳤다.레노가 국무회의 휴회를 선언했다. 그리고 2시간 뒤, 레노가 사임했고, 페탱이 총리에 임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다음 날인, 617, 페탱은 라디오를 통해 그의 유명한 연설을 했고, 이 연설에서, 그는 프랑스에 대한 그의 개인적 공로를 강조했고, 그리고 <전쟁을 종료해야 한다>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618일 런던의 드골은 그의 유명한 <전투를 계속해야 한다>는 연설로 대응하게 된다]


그렇다면, 폴 레노는 왜 국무회의와의 상의없이 사임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정확히 답변할 수 없고, 따라서 이 점이 이른바 <폴 레노 미스테리>를 강화시켜 왔다. 레노는 그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인들 중 한명이었다 : 그는 1930년대에 프랑화의 절하를 제안했다 ; 그는 기갑부대를 창설해야 한다는 드골의 제안을 옹호했다. 법률 전문가 였던 그는 나치즘의 위협을 빠르게 자각했다 : <히틀러는 빌헬름 2세가 아니라 징기스칸이다!>라고 휴전관련 논쟁이 벌어진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대독 선전포고 시기에 달라디에 정부에서 재무부 장관이었던 레노는 더 효율적이고 능동적인 전쟁정책을 추진하기를 원했다. 1940322, 달라디에의 후임 총리가 된 레노는 제2의 클레망소가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는 딴 판이었다. 정치적으로 고립된 레노는 단지 한표 차이로 총리인준을 받았다. 전쟁에 대한 확신에 찬 사람들로 구성된 정부를 구성하는 대신에, 그는 제3공화국 특유의 관습적인 정부를 구성했다. 그의 내각에는, 카미유 쇼탕을 필두로, 다수의 연약한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고, 510일 이후, 패배주의가 내각을 지배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정적인 달라디에를 외무부 장관에 임명할 수 밖에 없었고, 두 사람은 서로 말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513, 뫼즈강 방어선이 독일에 돌파당한 이후, 레노는 개각을 단행하고, 페탱을 부총리에 기용했고, 이는 베르덩 전투의 영웅의 후광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결정이 상황을 재앙수준으로 악화시키게 된다. 휴전에 관한 논의 동안, 레노는 또한 그의 정부인 엘렌 드 포르트 에 의해 시달림을 당했고, 그녀는 확실한 패배주의자였다. 많은 증인들이 그녀에게 그 결정적인 순간 동안 레노 총리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게 만든 책임을 돌리고 있다.


가장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가 국무회의에 상의하지도 않고 사임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이후의 몇가지 해석들에 따르면, 그가 압도적인 다수 찬성을 통해, 휴전에 대한 반대결의를 추진하는 것도 가능했다고 한다. 하지만, 레노는 아무런 이유없이, 페탱 이나 베강 같은 큰 힘을 가진 자들을 상대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의 사임은 무언의 고백에 다름아니었다 : 그가 페탱에게 후임 총리직을 넘긴 이상, 정통성이 이제 공화국 체제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명약관화하게 된 것이다. 정치불신이 고조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레노는 페탱과의 관계를 감히 단절할 수 없었다. 아무튼, 레노는 19405월에 제2의 클레망소가 되는데 성공하지 못했고, 뿐만아니라, 그는 1940618일의 드골 같은 비전,대담함,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


그는 이후 증언을 통해, 자신의 사임이 그 자체로 휴전에 대한 동의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그는 독일이 제안할 휴전조건이 페탱이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런 상황에서 대독 항전 정부가 다시 정권을 잡을 것이라 전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이상의 가정은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서 볼때, 탁상공론에 불과한 것이고, 부분적으로 도적적 변명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편, 히틀러도 유사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619, 히틀러는 무솔리니에게, 프랑스에 대한 휴전 조건들이 가혹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었고, 이는 프랑스의 주전파의 입지를 강화시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621, 27명의 의원들 (조르주 망델,에두아르 달라디에, 피에르 망데스 프랑스 포함)이 독일군을 피해, 북아프리카 행인 마실리아 호에 승선했고, 이는 그들이 휴전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624, 카사블랑카에 도착한, 그들은 독일프랑스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렇게 투쟁을 계속하기 위해 프랑스를 떠난 의원들은 페탱 정권에 의해 맹비난을 받았다.




덧글

  • BeNihill 2010/10/24 16:29 # 답글

    글을 읽다가 최초에 이 부분을 접했던 책에서는 비시 정부를 '독일이 나이 많이 들어 노망끼가 있는 페탱 앉혀놓고 꼭두각시로 사용했다'라고 포풍처럼 깠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 생각하면 노망드립까지 나온 맹비난..)

    페탱의 생각은 차차 자료들을 보며 정리해봐야겠지만.
    (2편의 글을 보면 노망드립은 오버인데 좀 의문이 가는 면들은 있네요....)
  • 파리13구 2010/10/24 17:01 #

    한때, 페탱은 독일의 꼭두각시 였고, 강요에 의해 대독협력을 했다고 보았던 시절의
    연구였다고 봅니다.

    페탱이 노망이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우리 베르덩 전투의 영웅을 말이죠.. ㅋㅋ
  • BeNihill 2010/10/24 17:06 #

    결국 연합국이 이기고 프랑스 내에서 드골이 짱먹었으니
    페탱이 포풍처럼 까이긴 까여야 되는데
    베르됭의 실적이 있기에 직격으로 까진 못하니 노망드립으로 보내버린...거겠군요;;

    다만 대개 군부는 이런 경우 결사항전이나 최종결전이라도 주장해보게 되는데
    (자기들의 실추된 입지를 만회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로)
    도대체 무슨 뒷꿍꿍이가 얼마나 깔려있었길래 이런 상황이 벌어지나...
    앞으로의 포스팅 기대하겠습니다.
  • 에드워디안 2010/10/24 17:11 #

    전후 오리올 대통령이 페탱의 신변문제를 두고 고민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 에드워디안 2010/10/24 17:09 # 답글

    폴 레노의 저런 무책임한 태도를 보자니, 동시기 군부의 괴뢰나 다름없던 일본 수상들이 생각나네요...

    카미유 쇼탕은 비시 정부에 의해 미국대사로 임명되어 워싱턴에 파견되었다가, 아예 그 곳에 눌러앉았죠. 전후 드골 정부가 개최한 궐석재판에서 사형이 언도되었음에도, 계속 미국에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네요.

    쇼탕이 조르주 보네와 식사를 하면서 정치 문제에 관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그 주제가 둘 중 누가 먼저 입각할 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고 하니, 수상은 물론 정치인으로서도 자질이 없던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_-
  • 파리13구 2010/10/24 17:16 #

    극우파들이 안되는 이유 중, 사람이 저질인 탓도 있다고 봅니다. ㅋㅋ..
  • 행인1 2010/10/24 19:12 # 답글

    아무도 나서지 않는 혼란상태로군요. 쩝...
  • 파리13구 2010/10/25 08:28 #

    그렇습니다...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