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패배와 제3공화국의 붕괴(1) 레지스탕스

 



정치인들의 잘못이었나
?



1940년의 프랑스 패배가 제3공화국의 붕괴로 귀결되었다 ; 필립 페탱에게 710일 모든 합헌적 권력들이 이양되었다. 이 패배에서 정치인들의 책임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프랑스 파리 - 월간 <역사> 20104월호 352


줄리안 잭슨


Julian Jackson



프랑스 군사적 패배가 불가피하게 정치 위기로 귀결되었다 : 마치 보불전쟁의 세당에서의 패배가 1870년 프랑스 제2제정의 붕괴를, 1918년의 패배가 독일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던 것처럼 말이다. 1940년의 프랑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05,6월의 군사적 패배가 2중의 정치적 위기를 유발했던 것이다. 첫번째는 616일 보르도에서 발생했고, 바로 이 날에, 전투를 계속하기를 원했던 폴 레노 총리가 사임했다 : 그는 페탱 원수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페탱은 독일과 휴전협정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번째는 710, 비시에서 발생했고, 그 날,3공화국의 의회 (상하 양원 합동의회)가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하기로 결의했고, 페탱에게 개헌을 위한 전권을 주었다.



<휴전 이냐 정전 이냐?>


이 두개의 위기들 -즉 폴 레노 정부 실각 과 공화국의 자살- 이것들은 별도로 진행되었지만, 실제로는 서로 관련이 있었다. 이 위기의 배후에는 베강 장군 과 페탱 원수가 있었고, 그들이 레노를 사임으로 몰아갔다는 점에서, 정치적 위기였다. 정부의 책임을 자인하는 휴전협정 보다는, 레노 총리는 베강 장군이 프랑스 본토에서의 프랑스군의 항복선언에 서명하기를 원했다; 동시에,프랑스 정부는 네덜란드 정부처럼, 프랑스를 떠나, 북아프리카 혹은 다른 프랑스 해외영토에서 전쟁을 계속하고자 했다. 하지만 베강은 이 계획에 반대했고, 이는 프랑스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였고, 패전의 책임을 정치인들에게 떠넘기기를 원했다.


이렇게 군부 와 정치인들 사이에서 발생했던, 날카로운 대립은, 역설적으로 한 군인인 드골 장군이 65일에 전쟁부 부장관으로 입각하게 만들었고, 드골은 군부의 요구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611, 베강이 드골에게 질문했다. "정부가 당신에게 무엇을 제안했는가?" 이에 드골은 다음과 같이 무뚝뿍하게 대답했다. "정부는 제안하지 않는다. 정부는 다만 명령할 뿐이다." 드골에게 모순은 명백했을 뿐이었다 : 1차세계대전에서의 독일 패전 원인에 대한 그의 1923년에 출간된 책에서, 드골은 독일의 패인이 부분적으로 군부가 정치에 지나치게 개입한 상황 때문이라 분석한 바 있고, 1960-1961년 알제리에서의 군부의 반란에 이르까지, 드골은 일관되게, 행정부의 권력이 군부의 그것보다 우월하고 그리고 우월해야만 해야 한다고 믿었다. 드골에게, 1940년의 드라마는 국가가 군의 패배의 결과를 감당하기에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라 보았다. 드골의 판단은 분명히 19406월 당시의 프랑스 대통령이던 알베르 르브랭에 대한 것이었다 : 르브랭은 명예로운 인간이었지만, 프랑스 정치지형에서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도파 출신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힘이 없었고, 그는 휴전협정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전통적으로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해야할 책임이었던, 이런 종류의 문제에 감히 개입하지 못했던 것이다. <본질적으로,당시 국가원수에게, 그에게는 두가지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는 원수도, 국가의 원수도 아니었다."라고 드골은 자신의 회고록에 저술했다.


525일부터 정부내부에서 휴전관련 논의가 시작되었고, 세당에서부터 연합군 전선쪽으로 깊숙하게 들어온, 독일 전차부대의 진격로를 중간에서 차단하려 했던, 베강의 작전이 실패하면서 휴전논의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논쟁이 실제로 시작된 것은 610, 프랑스 정부가 파리를 버리고 피난을 시작한 이후 부터 였다. 논쟁은 매우 혼란한 상황속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베강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안한 것은 612, 브리아르의 뮈게성에서 였다.


이러한 프랑스 내부의 위기는 영불위기로 배가되었고, 이는 1940328, 양국정부가 각각 독일과 어떠한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는 협정에 합의하면서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과의 이 합의에 서명한, 폴 레노 총리는 자신의 합의를 번복하기를 거부했고, 한편 휴전파들은 영국의 프랑스에 대한 지원에 대해 인색하다고 맹비난하면서, 프랑스의 전통적인 <반영정서>가 점점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영국정부가 이 합의로 프랑스 정부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동맹국 프랑스가 독단적으로 행동할수도 있고, 프랑스가 독일과 맺게 될지도 모르는 휴전협정에 대한, 영국의 발언권이 사라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 영국정부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프랑스 함대가 독일 수중으로 넘어가는 사태였다. 처칠은 611일 브리아르 를, 13일에는 투르 를 방문했고, 이는 프랑스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후자의 방문에서, 처칠의 발언이 매우 모호했다 - 그는 휴전을 고민하는 프랑스의 상황을 이해한다고 했고, 이것이 휴전파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덧글

  • BeNihill 2010/10/24 13:49 # 답글

    이렇게 군부는 정부를 까고 정부는 군부를 까는 여건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 파리13구 2010/10/24 13:55 #

    망하는 국가의 공식이라 할 수 있죠...^ ^
  • 에드워디안 2010/10/24 16:58 # 답글

    제3공화국 시대의 대통령들은 헌법상의 제약으로 인해 이렇다할 실권을 거의 제대로 발휘하진 못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허수아비도 아니었죠. 드레퓌스 사건을 해결하여 공화정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고, 영국과의 관계를 개선한 에밀 루베가 대표적 사례...

    말씀하신대로 르브룅은 중도 성향으로 좌파와 우파를 가리지 않고 모든 내각에 잘 적응했지만, 정착 지지기반이 약했던 탓에 조각이나 정책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드골의 지적대로 '국가 원수가 아닌 국가 원수'였던 셈...

    게다가 제4공화국 시대에 가면 대통령은 물론 수상도 허수아비로 전락해,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되어버렸죠. 그래서 알제리에서 반란이 일어나는데도 속수무책이었던 것이고...-_-
  • 파리13구 2010/10/24 17:03 #

    네, 이때부터 드골은 이미 제5공화국의 대통령 상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강력한 대통령을 가진, 강력한 국가 프랑스...^ ^
  • 행인1 2010/10/24 19:09 # 답글

    말씀대로 드골은 이때부터 프랑스의 정치체제에 대해 고민했겠군요.
  • 파리13구 2010/10/25 08:28 #

    따라서, 프랑스전투가 프랑스현대사에서 중요한 순간이라 판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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