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패배,우연인가 필연인가?"(1) 레지스탕스

 



<
패배는 필연적이었나?>


19406월 패주에서 프랑스 장군들의 책임은 어떤 것이었나? 독일전차는 난공불락 이었을까? 전격전은 아무런 결점도 없었던 전략이었나?


프랑스 파리 - 월간 <역사> 20104월호 352


올리비에 비비오르카



1940년 프랑스전투에서 대포의 포성이 사라지자 마자, 필립 페탱과 샤를 드골이 19406월부터 패배에 대해 서로 다른 교훈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베르덩 전투의 승리자였던 페탱은 620일의 라디오연설에서, "병사수도 적었고, 무기도 적었고, 동맹군도 부족했다."고 울먹인 바 있고, 프랑스군 패주는 <기강해이>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625일 연설에서, "도취감이 희생정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파괴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반면, 618일의 인간, 샤를 드골은 그 날의 유명한 연설에서, "우리를 후퇴하게 한 것은 독일군의 수라기보다는 그들의 탱크, 비행기, 전술이다."라고 강조하고, "우리를 패배시킨 그들의 전술과 동일한 것을 익힌다면, 우리가 언젠가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두가지의 서로 대립되는 진단들이 이후로도 오랫동안 역사가들을 두개의 파로 분열시켰다. 우선 한 학파는, 앙리 미셸, 장 밥티스트 뒤로셀 그리고 가장 최근의 클로드 퀴에텔이 여기에 속하고, 이들은 1940년의 패주를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적,외교적,경제적,사회적 실패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고, 바로 양차대전 전간기 동안에 1940년의 프랑스 몰락 원인이 대두한 것으로 본다. 한편, 다른 쪽에는, 많은 외국 역사가들 과 마르탱 알렉상데, 로베르 두그티, 칼하인츠 프리제 같은 사람들이 있고, 이상의 운명론적 시각에 반대한다. 양측의 군사력이 상대적으로 비등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 역사가들은 독일의 승리가 일정부분 <우연>의 산물이고, 연구대상을 1940년 여름의 짧은 기간으로 한정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주제 전공 역사가들은 2개의 논리들 중 에서 한가지 입장을 채택하고 있고, 한쪽이 패배에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면, 다른 한쪽은 도덕적 판단은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패배는 우연이었나 아니면 필연이었을까?



<1930년대의 실책들>


19399, 프랑스가 전쟁이라는 시련에 직면하게 됐을때, 프랑스는 최소한 외교적 관점에서 취약한 상태에 있었다. 확실히, 프랑스는 1939년 이래, 영국의 단호한 지원에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고, 영국은 19393월의 체코 지역의 불안정을 목도하고 있었고, 즉 나치 독일이 자신과의 약속을 존중하지 않고 있었고, 영국은 폴란드의 독립을 보장했고,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약속하고 있었다. 네빌 챔벌린이 추진했던 유화정책에서 체코공화국의 붕괴를 용인한 1938년의 뮌헨협정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영국의 외교적으로 갑작스러운 입장정리가 오랫동안 지속된 영국 외교의 일련의 실수를 만회해주는 것은 아니였다. 유럽대륙에서의 프랑스 헤게모니를 두려워했던, 런던은 파리가 자신의 안보를 보장하기 위해 끊임없이 제기한 요구들에 대해 귀를 닫고 있었다. 1923년 루르 점령시 프랑스 총리, 레이몽 푸앵카레의 완강한 정책을 지지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던, 영국은 자신의 옛동맹국 프랑스로부터 멀어져 갔으며, 이후 단독으로 1935년 베를린과 해군협정을 조인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1939, 영국이 환상에서 깨어나, 프랑스가 자신의 안보에 대해 품고있던 불안이 근거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입장변화는 너무 늦게 찾아온 것이었고, 뮌헨에서의 실수도, 프랑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입장도 되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프랑스는 소련과 동맹관계를 구축하지 않고 있었다. 19355월에 소련과 맺은 조약은 국제연맹이라는 틀안에서의 양국간의 상호원조만을 약속한 것이었고, 이는 어떤 구체적인 보장 효과를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또한 프랑스 지도자들은 소련과 군사적 동맹 관계 구축을 추진하지 않았고,그들은 붉은 군대의 가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또한 소련군사동맹으로 인해, 폴란드를 불쾌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고, 소불 군사동맹이란 유사시 소련군이 동맹국 프랑스를 돕기 위해서는 폴란드 영토를 통과해야만 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런던과 파리의 망설임을 확인한, 스탈린은 따라서 냉소적으로 대응했다. 스탈린은 1939823일 독일 제3제국과의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기로 결론내렸다.히틀러는 만족했다 : 그는 두개의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르기를 원하지 않았고, 독소불가침조약을 통해, 자신의 병력을 서부전선에서의 공격작전에만 투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군소 동맹국들의 외교행보도 최소한 우유부단한 것으로 보였다. 나치 독일로부터 위협을 줄이고자 끊임없이 노력했던 폴란드는 1934126, 독일에 대해 비적대 선언을 했다. 벨기에는 1936년에 노골적인 중립 입장을 되풀이했고, 이것이 연합국이 공동 군사작전을 계획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1935년의 에디오피아 침공 이후 국제연맹을 탈퇴한, 이탈리아는 결국 독일쪽에 접근, 193611월에 동맹국이 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입장변화는 매우 치명적인 것이었고, 이는 당시까지 이탈리아가 독일 제3제국에 대해 불신을 표출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이탈리아는 1934년 독일이 실패했던 오스트리아 병합 시도 때, 이를 막기 위해 알프스산맥의 브러네 고개로 군대를 출동시킨 바 있었다. 이러한 입장변화에 프랑스에 대해 더 공격적인 요구들이 추가되고, 193811, 이탈리아 하원은 "튀니지! 코르시카! 지부티!"를 요구하고, 여기에 니스 와 사보이 까지 이탈리아가 병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1차세계대전 때와 다르게, 프랑스에게는 러시아의 지원도, 이탈리아의 우호적 중립도 없었고, 단지 영국에만 의지한 상태에서 전쟁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상황에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에게 효율적인 외교적 수단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독일의 시각에서 볼때, 베르사유 조약의 엄격한 적용을 추진하는 프랑스 정책은 온건한 바이마르 공화국을 약화시킬 뿐이었고, 나치당 같은 극단주의자들의 입지만을 강화시켜주는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프랑스 지도자들은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나치 독일의 반복되는 위반행위들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했고, 1935년 독일의 징병제 재도입, 1936년 라인란트 군사점령, 1938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강제합병, 19393월의 체코의 분할 등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했던 것이다. 이는 모호한 평화주의의 산물이었고, 물론 실제로는 이것은 전쟁의 위험을 막기위한 것이기도 했고, 프랑스의 반공주의도 한몫해서, 소련보다는 차라리 나치 독일과 친해지는 편을 선호하게 만들 정도였다. 이러한 논리가 심지어, 19391130일 소련의 핀란드 침공 이래, 1939-1940년 동안 프랑스 함동참모본부가 핀란드에 대한 지원 과 바쿠에 대한 폭격을 계획하게 만들 정도에 이르게 했고, 이는 당시의 프랑스 고위 지도층의 정신에 어떤 것이 우선적인 것인지 명확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나치의 급진성은 프랑스 지도자들이 히틀러가 새로운 비스마르크라는 것을 간파할 수 없게 만든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193993, 프랑스는 확실한 동맹관계가 없는 상황속에서 전쟁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것이 프랑스의 힘을 약화시키는데 공헌했다.




덧글

  • 행인1 2010/10/16 19:36 # 답글

    일단 전쟁 전의 외교부터가 문제였군요.(사실 장군들도 꽤 문제였지만)
  • 파리13구 2010/10/17 08:16 #

    네, 제1차세계대전과는 다른 외교환경에서 전쟁에 임한 것으로 보입니다.
  • 미연시의REAL 2010/10/16 20:05 # 답글

    결과적으로 정치문제인 외교의 문제를 탓할 사항은 아니라 봅니다.
    프랑스가 1940년 프랑스 전역에서 패배한 이유를 나중에 전역이 끝난후 사회적으로 평화주의자들에게 그 책임을 돌린 장군들의 예가 있듯이..(공산주의자 포함 물론 공산주의자들은 그 책임에서 벗어날수 없지만 말이죠.)

    정치적인 위 문제는 솔직히 독일에게 패배했다는 결정적 핵심의 요인이 되지 못합니다. 그들이 패배한 이유는 정치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문제는 단순한 부수적인 사항일뿐이죠. 가장 핵심은 당연한 군사적 문제입니다. 독일군보다 우월한 상황의 전력보유를 한 프랑스군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패배했다는것은 그들의 전략자체와 작전술의 개념이라든지 무기체계에서 핵심의 개념에서 이미 너무나 구시대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죠. 실제 전격전의 전설에서 유명한 고언중 이런말이 있죠.

    우리는 1910년 군대로 맞서싸웠다고 말이죠... 1차대전의 개념만을 고집한 전술과 전략 그리고 유형적 존재를 갖고 있는 그들에게 있어서 아무리 양적으로 우수하고 질적으로 우수한 프랑스군이었다할지라도 독일군에게 군사적 패배를 당할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며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가장 보수적인군이 항시 변혁에 깨어있고 능동적이지 못하면 전쟁이 나면 큰피해나 혹은 패배를 당할수 밖에 없다는 군사적인 핵심적 문제를 보여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 파리13구 2010/10/17 08:17 #

    좋은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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