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대계 레지스탕스가 사는 법... 레지스탕스

 


[한 레지스탕스의 초상]


레이몽 오브락,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레지스탕스의 정신이다. »


프랑스 파리 - <위마니테>



2010년 6월 28일


레이몽 오브락
, 그는 유대계 정교분리, 공화주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그의 인생역정은 정의 와 평등을 위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고, 이 가치들이 평생동안 그를 이끌었다.


레이몽 오브락은 현재 97세이다. 2007년 그의 아내 루시가 세상을 떠난 후로, 그는 역사책에서 가르쳐 줄 수 없는 20세기 역사의 기억들을 전승하는데 헌신하고 있다. 가령, 1차세계대전,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레지스탕스, 탈식민화의 고통, 냉전, 베트남전 등. 그는 이 사건들이 발생한 시대를 살아왔고, 때로 각급학교에서 이 주제들에 대해 강의를 한다. 그가 잘 알고 있는 역사는, 히틀러 집권기의 청년세대, 1940년 프랑스의 패배, 레지스탕스 결성 배경, 프랑스 해방운동 위원회의 탄생, 레지스탕스 전국회의의 강령들, 식민지 제국의 소멸, 소련 해체 등


아내와 사별한 후, 그가 방문한 교육기관이 몇군데인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는 집에서 버스를 타고 역에서 하차해서, 기차를 타고 먼 곳에 있는 학교들을 방문한다. 사람들이 그에게 이렇게 열심히 활동하는 이유를 물으면, 그는 질문에 대한 회피한다.


Portraits de résistants


Raymond Aubrac « Il faut être optimiste, c’est cela, l’esprit de la Résistance »

Par Pascal Convert, artiste plasticien, auteur (*).


La trajectoire 
de Raymond Aubrac (Raymond Samuel), né dans une famille juive laïque et républicaine, témoigne d’une volonté exceptionnelle de justice et d’égalité, qui se prolongera
toute sa vie.



« Vous savez mon système est très au point. Dès que l’on m’invite, j’accepte de venir. Comme cela, je ne suis pas seul. Et puis les salles de classe sont chauffées et la cantine agréable. Et je ne manque jamais de saluer le cuisinier ! »


오브락 - « 나의 행동은 매우 원칙적이다. 사람들이 나를 초대하면, 나는 받아들인다. 이것 때문에, 아내가 없어도, 나는 외롭지 않다. 그리고 교실은 따스하고, 교내식당 분위기도 좋아한다. 그리고 나는 조리사에게 인사하는 것을 결코 거르는 법이 없다. »


Il faut avoir assisté à une rencontre de Raymond Aubrac avec des collégiens ou des lycéens pour comprendre les enjeux d’un tel dialogue. Loin de procéder à une simplification hâtive ou à une héroïsation de la Résistance, Raymond Aubrac entreprend d’initier les jeunes à la complexité et à l’évolution d’une situation.


그의 역사교육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기 위해서는, 오브락이 중고등학생들에게 강의하는 것을 참관해야만 한다. 그는 결코 레지스탕스 운동에 대해 무모하게 일반화하지도, 영웅화하지도 않는다. 오브락은 청소년들에게 상황의 복잡성 과 진화 과정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 À la fin de la guerre, le général de Gaulle a fait des discours dans lesquels il disait que les Français avaient été résistants. Dans la même période, les communistes disaient la même chose. Les uns et les autres ne disaient pas la vérité mais ils ne disaient pas non plus quelque chose d’erroné. Au printemps 1944, les résistants pouvaient demander du secours, de l’aide à peu près à tout le monde. L’opinion publique en France entre 1940 et 1944 avait beaucoup changé. Il faut en tenir compte. »


전쟁 말기에, 드골 장군은 한 연설에서 모든 프랑스인들이 레지스탕스였다고 발언한 바 있다. 같은 시기에, 공산주의자들도 비슷한 발언을 했다. 물론 두 정치가 진실을 말한 것은 아니지만, 완전히 틀린 소리도 아니였다. 1944년 봄, 프랑스 레지스탕스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원조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이렇게 1940년부터 1944년까지 프랑스의 여론이 크게 변화했다. 이 점을 고려해야만 한다. »


Un jour, invité dans un collège dit « sensible », adjectif utilisé pour désigner une population de banlieue aux origines multicolores, il a perçu que l’attention des élèves était flottante quand il a raconté sa première rencontre avec Jean Moulin. Et il leur a parlé de l’autre Résistance, la Résistance des peuples colonisés, de l’arrivée d’Hô Chi Minh chez lui, de leur amitié, de la manière dont il avait convaincu le pape d’intervenir pour faire arrêter les bombardements américains sur les digues du fleuve Rouge, de ses rencontres avec Kissinger ou Mac Namara quand il tentait d’éviter une escalade de la guerre au Vietnam, du 30 avril 1975 où, à Hanoï, il assista à la joie silencieuse d’un peuple qui s’était libéré. Le professeur d’histoire n’avait jamais vu une telle attention dans sa classe.


어느날, 그는 다양한 이민자 2세 출신 학생들이 다니는, 교외빈민가의 한 중학교로부터 초대를 받았고, 그는 그가 처음으로 <장 물랭>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영웅] 과 만났을 때를 회고해 주면서, 학생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학생들에게 또다른 레지스탕스 역사를 강의했고, 그것은 바로 식민지 민족들의 레지스탕스로, 베트공 지도자 호지명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의 일화, 그들 두명 사이의 우정, 그가 교황을 만나서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폭격을 중지시켜야 한다고 설득했던 일, 그리고 키신저 와 로버트 맥나마라 같은 미국 정치인과의 만남 등. 이렇게 그는 베트남전쟁의 확대를 막기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1975430, 하노이에서, 해방된 한 국민의 조용한 감격을 목격하기도 했다. 이 학교 역사교사는 자기 반 학생들이 이렇게 집중해서 강의를 처음으로 봤노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De manière rituelle, Raymond Aubrac termine ses visites en incitant ses jeunes interlocuteurs à l’optimisme.


항상, 오브락은 그의 강연을 마치면서, 청소년들에게 낙관주의자가 되라고 충고한다.


« La Résistance était une action volontaire. C’est-à-dire qu’on pouvait y entrer et en sortir quand l’on voulait. Et on s’aperçoit que les gens qui sont entrés en Résistance y sont restés. Beaucoup d’entre eux ont été arrêtés, fusillés, déportés, mais ils sont restés… pourquoi ? À mon avis personnel, par solidarité avec leurs camarades. Les résistants sont liés par des liens très forts, comme des frères et sœurs. Il faut être optimiste, c’est cela l’esprit de la Résistance. C’est une chose qu’on ne dit pas assez. Tous les gens qui se sont engagés dans la Résistance sont des optimistes. Ils ne baissent pas les bras et sont persuadés que ce qu’ils vont faire va servir à quelque chose. Il faut avoir confiance en soi, être optimiste et croire que ses combats sont utiles. »


레지스탕스는 자발적인 활동이었다. 말하자면, 우리는 자신이 원할 때, 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고, 심지어 탈퇴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리고 우리가 목격한 것은, 한번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사람들은 이 운동을 끝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체포, 총살,강제이송 되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레지스탕스였다. 무엇때문이었을까? 나의 개인적인 견해로는, 그것이 바로 동지적 연대 때문이었다고 본다. 레지스탕스들은 매우 강력한 유대감으로 결속되어 있었다. 마치 형제 와 자매들 처럼 말이다. 낙관주의자가 된다는 것, 이것이 바로 레지스탕스 정신이다. 이것은 충분하게 강조되지 않은 부분이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모든 사람들은 낙관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고, 대의에 대한 헌신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낙관주의자가 되고, 자신의투쟁이 유용하다고 믿어라! »




덧글

  • dunkbear 2010/09/30 19:05 # 답글

    저항의 낙관주의라...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정신입니다... 존경할 수 밖에 없네요.
  • 파리13구 2010/09/30 19:44 #

    ^^
  • 행인1 2010/09/30 23:28 # 답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믿는다는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지요.
  • 파리13구 2010/10/01 08:37 #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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