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싱호 격침사건과 청일전쟁 그리고 영국? Le monde

<그림은 청일전쟁 초기에 격침된 영국계 선박, 코싱호 >

이 글은 청과의 일전을 각오하고 조선에 출병한 일본 지상군이 대청 개전을 2달정도 지연한 이유를

당시의 국제관계, 특히 영국의 대일정책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참고서적 -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최문형 교수에 따르면, 청일전쟁은 아시아에서 제국주의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으로 청나라는 그 무기력함을 드러냈고, 이 중국의 무기력을 열강은 대청외교의 입장변화에 반영시켰고, 이렇게 청일전쟁 이후 청은 열강 침략적인 분할 대상으로 전락했다.


이 글에서는, 당시 세계최강국이자, 동아시아에서도 막강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던 영국의 청일전쟁에 대한 입장 과 영국의 대청 입장 변화 그리고 이것이 결국 1902년의 영일동맹의 성립으로 귀결되는 역사를, 1894년의 <코싱호 격침사건>을 중심으로 알아본다.


우선, 청일전쟁에서의 일본의 적국이었던 청에 대해, 당시 영국이 가지고 있었던 입장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마디로, 영국은 청과의 여러 이해관계로 인해, 개전할 경우 청을 지원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일본이 개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영국을 가장 두려운 상대로 간주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 청에 대한 영국의 정치적 경제적, 밀착적 이해관계 때문에, 일본은 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경우 영국의 , 외교적 혹은 군사적 개입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국측의 반일론도 만만치 않았다. 영국의 동양 함대 사령관 프리맨틀 제독을 위시한 해군본부는 상업 보호를 위해, 친청반일 노선을 고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을 주도하고 있었던 당시의 로즈버리 총리와 킴벌리 외무부 장관의 생각은 이와 달랐다. 그들은 친청반일이 아니라,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 남하를 막기 위해, 청나라 와 일본을 동시에 영국의 앞잡이로 이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반러시아를 위한, ,,일 블록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영국의 두 앞잡이, 일본 과 청나라의 전쟁은 막아야만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영국은 프랑스,독일,러시아,미국 등의 열강과 공동으로 일본에게 철병을 강요하기도 했고, 때에 따라서, 월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한 포함외교를 통한, 영국의 단독개입만으로 청일간의 전쟁을 막을 수도 있었다고 계산했다. 당시 현실적으로 영국은 이 전쟁을 막아야만 할 필요가 다른 어느 나라들 보다 더 절실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국은 개입을 주저할 수 없었고, 실제로 주저했다.


영국의 이같은 주저는 당시 조선의 일본군의 동향과 일본의 대청 개전의지에 영향을 주었다. 가령, 일본은 189468, 동학농민운동에 따른 청나라 군대 파병 소식을 접하고, 천진 조약에 따라, 4,500명의 일본 군대가 제물포에 상륙시킨 바 있다. 그런데, 양측 지상군이 전투를 벌이는 것은, 728일 아산 부근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이 조선에서, 대청 지상전투 개전을 약 2달정도 미룬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일본이 영국의 무력 개입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청 개전을 결정할 수 있었던 어떠한 배경에서 였을까? 일본은 어떻게 영국의 개입은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상황에서 주목되는 사건이 바로, 아산 전투 직전인 1894724일에 발생한, <코싱호 격침사건>이다.


코싱호 격침사건이란 무엇인가? 코싱호는 인도차이나 항해회사 소속의 선박으로 상해에 있던 이 회사 대리인 매디슨을 통해 천진에서 이홍장에게 대여되었다. 이 선박은 1000여명의 병력을 한국으로 수송하다가 1894724(서양 날짜) 아산만에서, 토고 헤이하치로 함장 지휘하의 일본 순양함 나니와 에 의해 격침되었다.


한글 위키피디아는 이 사건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청나라에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Indochina Steam Navigation Company) 소유의 2,134톤급 영국 상선, 코싱호 [가오슝(高陞)] 가 있었는데, 이 배는 청나라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으로, 골즈워디(T. R. Galsworthy) 선장과 64명의 승무원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가오슝호는 1,200명의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가 적재되어 있었으며, 조강호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 소령(Major von Hanneken)도 승선하고 있었고, 7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토고 헤이하치로 선장이 지휘한 순양함 나니와호가 두 배를 가로막았다. 군함은 결국 포획되었고, 일본은 가오슝호에 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로 옮겨탈 것을 요구하였다. 어쨌거나, 승선한 1,200명의 중국인들은 다시 돌아갈 것을 원했고, 영국 선장과 선원들의 생명을 위협하였다. 4시간의 협상 끝에, 토고 선장은 사격할 것을 명하였다. 유럽인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사격했으며, 일본군은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다. 가오슝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군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다. »



이 코싱호 격침사건은 당시 영국에서, 최근의 천안함 격침사건 만큼의 분노를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가령, 1894731일자 미국 <뉴욕타임스> 관련보도는 당시 영국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제목 - 코싱호 침몰


영국에서 야만적 행동에 대한 비난고조 중


일본의 횡포에 따라 생존자 41명일 뿐


물이 빠진 사람들에 대한 총격이 가해졌다는 보도.


당시 코싱호는 대영제국의 깃발을 달고 운항 중이었다는 보도.


일본이 이 배에 대해 항복을 요구했지만, 이를 거부함


장교들 중 생존자 없음.


런던이 분노하고 있다. »



이렇게, 청일개전을 막고자 하는 영국에게, 영국선적의 <코싱호 격침사건>은 개입을 위한, 좋은 명분이었고, 영국도 이 사건에 대해 대일 적의로 불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고, 이 사건 국면에 이르면, 청나라 편에서 일본 편으로 기운 상태였고, 이는 장차 러시아 남하를 막기 위해, 일본의 해군력을 이용해야 겠다는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 <코싱호 격침사건>에도 불구하고, 영국 사법당국은 이 사건을 선상반란 사건에 대한 정당한 개입이라는 국제법에 의거해서, 일본에게 유리하게 판결해 주었고, 영국 정부도 또한 이 사건을 청일전쟁 개입을 위한 명분으로 이용하지 않았던 것이고, 이같은 영일친선 분위기가 1902년의 영일동맹의 초석이 된것이라 본다.


또한, 이렇게 <코싱호 격침사건>에도 불구하고, 영국측의 개입징후가 없다는 것을 분위기를 감지한 일본은, 우려했던 영국의 개입따위는 없다는 것을 확인한 직후, 이 사건 발생 4일후에, 대청 지상전을 도발한 것이 아닌가 해석할 수 있다.




덧글

  • 만슈타인 2010/10/02 16:19 # 답글

    허 그 가오슝호 사건 -_-;; 예전에 모 책에서 본게 어렴풋이 기억납니다만... 이때부터 일본이 막 나가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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