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강점기]프랑스 공산당의 대조국 레지스탕스? 레지스탕스

<사진은 독일강점기에 샤토브리앙에서 총살당한 청년공산주의자 기 모케를 추모하는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광고이다.>

 

프랑스공산당 과 레지스탕스


19399, 프랑스 공산당은 독소불가침 협정을 승인한다 : 이 협정은 나치 독일과 소련간의 조약은 양국간의 불가침을 규정하고, 이후 폴란드의 분할의 근거가 되었다. 이에 프랑스의 달라디에 총리는 프랑스 공산당을 불법단체로 규정했다. 이렇게 공산당은 선출직 당직자들 내부의 분열과 비합법 지하활동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 주요 공산당 지도부는 벨기에로 피신했고, 디미트로프의 지령에 따라, 모리스 토레즈는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당시의 당 핵심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 생산을 한 시간 지연시키면, 혁명이 한 시간 먼저 시작된다. » 몇몇 공산당 활동가들은 독일과의 <가짜 전쟁>동안에 프랑스의 군수공장에서 생산방해활동을 전개했다. [역자주 – 가짜전쟁? 가짜 전쟁(Phony War, 독일어: Sitzkrieg, 프랑스어: drôle de guerre, 폴란드어: dziwna wojna)은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 국가들이 독일에 전쟁을 선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부 전선에서 별다른 전투가 일어나지 않은 기간을 일컫는다. ] 몇몇 공산당계열 징집병들은 프랑스 전투 동안, 독일과 맞서 싸우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En septembre 1939, le Parti communiste français approuve la signature du pacte germano-soviétique : l'accord entre l'Allemagne nazie et l'URSS qui établit un pacte de non-agression entre les deux pays et organise le partage de la Pologne. Daladier impose la mise hors la loi du PC. Il s'en suivra une scission au sein des élus du parti et une période de clandestinité : l'essentiel de la direction du parti est alors regroupée en Belgique, et, sur un ordre de Dimitrov, Maurice Thorez déserte et rejoint Moscou. Suivant les consignes du Parti, « Une heure de moins pour la production, c'est une heure de plus pour la révolution », certains militants commettent des sabotages dans les usines d'armements françaises pendant la Drôle de guerre[2]. À noter également que certains appelés refusent de combattre les allemands lors de la campagne de France.


La clandestinité sera brièvement interrompue durant l'été 1940, pour demander en vain, via l'avocat communiste Robert Foissin, membre de la défunte Association juridique internationale (AJI), l'autorisation de faire reparaître légalement L'Humanité aux autorités allemandes qu'il obtiendra en échange de la censure des Allemands mais Vichy y mit son veto. Ainsi l'interdiction se prolongera jusqu'à la Libération, en été 1944. Une partie des élus du PC fonde le Parti ouvrier et paysan français (POPF) qui regroupait les anciens du PC partisans de la Collaboration (plus d'élus que de militants).


프랑스 공산당의 비합법 상태는 독일강점기인 1940년 여름 잠깐 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이는 결국 무위로 돌아간 시도 때문이었고, 당시 공산당 계열 변호사이자, 국제 사법협회의 회원인 로베르 푸아생이 독일 점령당국에게 공산당 기관지, <위마니테>의 복간 허가를 요청한바 있고, 이는 독일당국의 검열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허락될 뻔 했지만, 비시 정부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이렇게 공산당 활동 금지가 1944년 여름의 <프랑스 해방>때가지 지속되게 된다. 한편, 공산당 출신 선출직 당선자들의 일부가 프랑스 노동자,농민당을 결성해서, 독일에 협력하는 옛 공산당 활동가들을 규합하기도 했다.


Bien préparé à la résistance par la pratique de la clandestinité, le PC français n'aurait engagé —selon une idée fortement répandue—, la lutte contre l'occupant qu'à partir de juin 1941 lorsque les troupes d'Hitler envahissent l'URSS. Cependant, bien des militants ou des groupes locaux communistes, qui n'avaient pas tous cessé subitement en 1939 ou 1940 d'être antifascistes, s'étaient spontanément engagés dans la résistance, sans demander la permission du parti. On citera par exemple Auguste Havez et Marcel Paul dans l'ouest de la France, la grève des mines du Nord, en mai 1941, cf. Auguste Lecœur), et plusieurs exemples locaux. Le 17 juin 1940, c'est avec un jour d'avance sur celui du général de Gaulle que Charles Tillon, chargé de réorganiser le PC dans le sud-ouest, lance un appel[3] à la résistance contre « le fascisme hitlérien ».


이렇게 비합법 지하활동에 뛰어난 적응력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 공산당은 알려진 바에 따르면, 히틀러 군대가 소련을 침공한, 19416월부터 독일 점령당국에 대한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한편, 일부 활동가들 혹은 지역 공산주의 분파들은 1939년 혹은 1940년에도 반파시즘 투쟁을 멈추지 않았고, 이렇게 자발적으로 당의 허가를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에 해당되는 사례로, 프랑스 서부의 오귀스트 아베 와 마르셸 폴 , 19415월의 북부 탄광에서의 파업, 그리고 이외의 지방에서의 공산당 지지자들의 투쟁들을 들 수 있다. 1940617, 드골 장군이 런던에서 항독 호소문을 발표하기 하루전에, 프랑스 남서부의 공산당 조직 재건을 책임지고 있었던 샤를 티용이 <히틀러의 파시즘>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을 호소한 바 있다.


À partir de juin 1941, les différentes organisations rattachées de près ou de loin au PC sont alors à même d'attirer un nombre important d'hommes et de femmes désireux de participer à la lutte contre l'occupant (en particulier le Front national et sa branche armée des Francs-tireurs et partisans (FTP)). La mouvance du PC devient importante au sein du Conseil national de la Résistance (CNR).


19416월부터, 공산당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다양한 조직들이 독일 점령군에 대항하기를 원하는, 많은 남녀 활동가들을 모집했다. 특히 항독 국민전선 과 그 무장조직인 <의용군> 조직이 그랬다. 이렇게 레지스탕스 전국회의 CNR에서의 공산당의 영향력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À noter qu'en 1943, Staline dissout le Komintern, et le parti français est désormais appelé PCF.


1943년에 스탈린은 코민테른을 해체시켰고, 이렇게 프랑스당은 프랑스공산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에서 프랑스공산당이 차지했던 중요한 역할 덕분에, 해방이후, 공산당은 75천명이 총살당한 정당이라 선전할 수 있었고, 이후 수십년 동안 프랑스 공산당의 정치적 전성기를 개막할 수 있게 되었다.




덧글

  • 행인1 2010/09/24 18:30 # 답글

    프랑스 공산당이 레지스탕스에 뛰어들게 된 배경이군요.
  • 파리13구 2010/09/24 18:34 #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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