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사블랑카 회담, 드골과 지로의 강제결혼... La culture francaise

사진 - 1943년 1월 14일 모로코 카사블랑카.
자유프랑스의 지도자 샤를 드골 장군이 루스벨트와 처칠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로 장군과 악수하고 있다.
루스벨트 와 처칠의 미소는 진심이었지만, 사진에서 드골이 웃음짓는 것은
그의 감정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포즈를 취하면서,드골이 루스벨트에게 영어로 한 말은
"I shall do that for you! 나는 당신을 위해 이것을 합니다!" 였다고 한다.
드골의 입장에서, 이것은 <강제결혼>이었다.



카사블랑카 회담 1943

 

카사블랑카 회담은 1943 1 14일부터 1 23일까지 모로코 카사블랑카의 안파호텔에서 열렸고, 이는 유럽 전선에서의 연합군의 전쟁전략을 조율하기 위해 열린 회담이었다.

 

La conférence de Casablanca (1943) se tint à l'hôtel Anfa à Casablanca au Maroc du 14 au 24 janvier 1943 afin de préparer la stratégie des alliés après la guerre à l'égard de l'Europe.

 

Cette conférence, parfois appelée conférence d'Anfa en raison de la localisation de l'hôtel où elle eut lieu, fut décidée par le président des États-Unis Franklin Roosevelt et le premier ministre britannique Winston Churchill, qui invitèrent à se joindre à eux d'une part Joseph Staline – qui déclina l'offre –, et d'autre part les généraux français Henri Giraud et Charles de Gaulle.


이 회담은 때로 안파 회담이라 불리기도 하고, 이는 회담이 열린 호텔이 안파 에 있었기 때문이고, 미국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와 영국총리 윈스턴 처칠이 그 개최를 결정했고, 원래 스탈린도 초대했지만 그는 이를 사양했고, 한편 프랑스 장군이 앙리 지로 와 샤를 드골도 초청을 받았다.

 

Joseph Staline s'abstint d'y participer. Quant à Giraud, qui gouvernait alors, en sa qualité de « Commandant en chef civil et militaire » l'Afrique du Nord et l'Afrique occidentale française, il accourut sans hésitation à la demande de Roosevelt.


스탈린은 불참했고, 당시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의 민간,군사분야 총사령관 이었던 앙리 지로는 루스벨트의 초대에 주저 없이 응했다.

 

Des décisions furent prises à cette conférence, quant à l'invasion de la Sicile, puis du reste de l'Italie, et quant à l'aide à apporter à l'URSS. Le but de cette conférence était également de réconcilier le Général de Gaulle et le Général Giraud.


이 회담에서 내려진 결정은, 우선 시실리를 침공하고 이후 나머지 이탈리아를 공격한다는 것이었고, 이는 서부에서 제2전선을 열어 소련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번 회담의 목적은 드골 장군과 지로 장군을 화해시키는 것이었다.

 

Charles de Gaulle, président du Comité national français de Londres (voir France libre) avait été le premier à proposer à Giraud une rencontre, après la disparition de Darlan, sans d'ailleurs recevoir de réponse. Mais il commença par refuser d'aller à Casablanca. Churchill, qui ne voulait contrarier Roosevelt en aucun cas, menaça alors de Gaulle de paralyser les activités françaises libres en Grande-Bretagne et de ne plus reconnaître que le seul Henri Giraud comme chef des Français au combat.


런던의 자유프랑스 의장이었던, 샤를 드골은 이전부터,다르랑 제독이 사망 1942 12 24일 직후, 지로에게 만남을 제안했지만, 어떤 답변도 듣지못했다. 이에 분개한 드골은 카사블랑카로 가기를 거부한다. 처칠은 어떤 경우든 루스벨트를 언짢게 만들지 않기를 원했고, 따라서 드골에게 영국에서 자유 프랑스의 활동을 마비시키겠다고 경고하고, 뿐만 아니라 연합국과 함께 투쟁하는 프랑스의 대표로 앞으로 지로 만을 인정하겠다고 그를 협박했던 것이다.

 

De Gaulle céda donc et vint à Casablanca. Il y rencontra Giraud, dans une atmosphère particulièrement tendue. Il s'indigna notamment que Giraud ait accepté que la garde de la conférence soit confiée à des troupes exclusivement américaines, et obtint qu'un détachement français de l'armée d'Afrique leur soit associé, avant de commencer tout débat.


결국 드골이 양보했고, 카사블랑카를 방문했다. 그는 그곳에서 지로를 만나게 되고, 매우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말이다. 그는 회담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로가 회담장 경비를 미군들에게 맡긴 것을 인정했다는 점을 비난하고, 아프리카 주둔 프랑스군도 이 경비임무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Les deux hommes d'État anglo-saxon qui soutenaient ostensiblement Giraud exhortèrent les deux généraux français à l'union, ce qui aurait du se traduire, selon leurs vœux, par la subordination du Général de Gaulle à Giraud, qui commandait beaucoup plus d'hommes.


앵글로색슨의 두 국가 정상은 지로를 노골적으로 지지했고, 두 프랑스 장군들이 연합할 것을 강요했으며, 이는 그들의 바람에 따라, 드골 장군이 지로에게 복속되는 것을 의미할 것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당시 지로는 드골보다 더  많은 병사들을 지휘 중에 있었다.

 

Aucun accord ne put être trouvé sur place, même si de Gaulle, pour faire plaisir à Roosevelt, accepta de serrer la main de Giraud devant les photographes


결국 회담장에서 두 장군 사이의 어떤 합의도 없었고, 드골은 자신의 의사와는 다르게, 단지 루스벨트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해서, 사진사들 앞에서 지로와 악수하는데 동의했던 것이다.

 


프랑수아 케르소디의 <드골 과 처칠>에 따르면,

카사블랑카 회담 직후, 드골에 대한 처칠의 유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번 회담 자체는 두 프랑스 장군을 손잡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영국 외교에는 승리였지만, 처칠에게는 개인적인 패배로 다가 왔다는 것이다. 이는 점점 드골이 처칠의 통제력 밖에 있다는 것이 명확해 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국총리는, 신랑(지로)은 이미 도착했는데, 신부(드골)는 왜 오지 않는가라는 루스벨트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드골 과 처칠>의 관련 장의 제목은 «강제 결혼»!]

 

회담 직후, 처칠은 자신의 절망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 아니요! 그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맙시다. 우리 이제 그를 잔다르크 라고 부르기로 하고, 그리고 그를 화형 시킬 수 있는 주교들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 ^




핑백

덧글

  • 행인1 2010/03/03 10:11 # 답글

    저때만해도 드골이 프랑스의 지도자 자리를 꿰찰줄은 아무도 몰랐겠죠.
  • 파리13구 2010/03/03 10:22 #

    드골만은 알고 있었을 겁니다. ^ ^
  • 어릿광대 2010/03/03 14:21 # 답글

    야심가 드골이라는 생각이 드는..
  • 굽시니스트 2010/03/03 22:50 # 답글

    드골이 영국으로 도망갔을 때 지로가 드골의 사형집행 명령서에 싸인했다지 말입니다.;
  • 파리13구 2010/03/03 23:10 #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런 지로와 손을 잡으로 강요한, 루스벨트에게 드골이 느꼈던

    분노가 짐작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 ^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2014 대표이글루


2016 대표이글루

2015 대표이글루

2013 대표이글루

2011 이글루스 TOP 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0 이글루스 TOP100

2017 대표이글루_history

방문자

광고

2018 대표이글루_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