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첫번째 희생자였을까? Le mo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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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한 오스트리아 여성의 눈물 - 기쁨의 눈물인가, 슬픔의 눈물인가?

 

1938년 독일의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Une curieuse lecture de l’histoire

[오스트리아] 역사에 대한 진지한 독해

 

프랑스 파리르몽드 디플로마티크

2009 7

 

«1960년대부터, 독일인들은 다른 유럽인들 처럼, 유사한 비타협적인 관점을 가지고 나치즘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라고 게르하르트 보츠, 빈의 현대사 교수이자, 루드비히-볼츠만 역사연구소 소장이 지적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도 최소한 비슷하게 시작은 했지만, 여전히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어떻게 독일과 오스트리아 간에 이런 차이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두 시기를 고찰해 보는 것으로 가능하다. 1945년 이전과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알아보아야만 한다.

 

« Dès les années 1960, les Allemands ont commencé à regarder le nazisme avec la même intransigeance que l’ensemble des Européens », explique Gerhard Botz, professeur d’histoire contemporaine à Vienne, et directeur de l’institut de recherche en histoire sociale Ludwig-Boltzmann (1). « Les Autrichiens s’y mettent à peine, et encore, pas tous ! » Comment une telle différence s’est-elle construite ? La réponse se décline en deux temps. Il faut considérer ce qui s’est passé avant 1945, et après.

 

Botz et ses collègues ont montré que, avant et pendant le IIIe Reich, « l’antisémitisme a été plus violent en Autriche qu’en Allemagne  (2)  ». Scènes terribles, en mars et avril 1938, au moment de l’intégration de l’Autriche au Reich (l’Anschluss), telle cette population hilare forçant de nombreux Juifs à se mettre à genoux pour nettoyer les rues de Vienne avec des brosses à dents... Quelques mois plus tard, des fonctionnaires autrichiens mirent en place un mécanisme bureaucratiquement très solide permettant l’expropriation des Juifs de leurs appartements et de leurs commerces. Admiratif, Hermann Göring importa le système en Allemagne, où il l’appliqua.

 

보츠 와 그의 동료들은, 독일 제3제국 이전과 이후, «반유대주의는 독일보다 오스트리아에서 더 폭력적이었다라고 지적했다. 오스트리아가 제국에 병합된 1938 3월 과 4월의 가공할 사건들을 보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수많은 유대인들에게 칫솔을 든 채 무릎을 꿇고 빈의 거리를 청소시키는 것을 강압하면서, 오스트리아인들은 웃고 있었다. 몇 달 후, 오스트리아 행정기관은 유대인의 집과 상점을 몰수하는, 매우 견고한 관료제적 조치를 도입했다. 이에 감명을 받은, 헤르만 괴링은 이 조치를 독일에 도입해 와서, 이를 실행에 옮겼다.

 

Lors du pogrom de novembre 1938 — la Nuit de cristal —, des rapports de la Gestapo décrivent une sauvagerie autrichienne bien plus effrayante que celle des Allemands. Enfin, toujours selon Botz, « les Autrichiens furent surreprésentés dans les postes-clés de la machine d’extermination » : Adolf Eichmann (arrivé en Autriche à l’âge de 8 ans), Alois Brunner, Ernst Kaltenbrunner (successeur de Heinrich Himmler à la tête de l’Office central de la sécurité du Reich, qui chapeautait la Gestapo), Odilo Globocnik (responsable, avec toute une équipe d’Autrichiens, de l’Aktion Reinhardt, au cours de laquelle plus de deux millions de Juifs et de Tziganes furent exterminés), Franz Stangl (commandant des camps d’extermination de Sobibor et de Treblinka), etc.

 

1938 11월의 이른바 <수정의 밤>, 게슈타포의 보고서들은 독일보다 잔인한 오스트리아의 야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또한, 보츠 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인들은 나치의 학살기구에서 핵심요직들을 두루 담당했다아돌프 아이히만 (8살의 나이에 오스트리아에 도착), 알로이스 브루너 (아이히만의 측근), 에른스트 칼텐부르너 (하인리히 힘러 후임으로 제국보안 중앙본부 부장에 임명되었고 게슈타포를 지휘했다), 오딜로 글로보츠니크 (라인하르트 작전의 오스트리아팀 총책. 이 작전 동안 2백만명 이상의 유대인과 집시가 학살되었다) 프란츠 슈탕글 (소비보르 와 트레블링카 나치 절멸수용소 소장) . [역자주오스트리아 린츠 출신의 아돌프 히틀러를 잊으면 절대로 안된다!]

 

Après la guerre, les nouvelles autorités autrichiennes imposèrent une lecture de l’histoire dont les effets se font sentir encore aujourd’hui. L’Autriche n’avait pas collaboré à l’entreprise nazie, mais en avait été, en raison de l’Anschluss, sa première victime ! Aussi partielle soit-elle, cette falsification fut acceptée par les alliés occidentaux autant que par l’URSS, en échange de la promesse de l’Autriche de ne basculer ni dans un camp, ni dans l’autre (3).

 

전후, 새로운 오스트리아 당국들은 그 파급력이 오늘날까지 여전히 남아있는 역사 읽기를 도입했다. 오스트리아는 나치 기구와 협력하지 않았고, 오히려 강제합병으로 인한 최초의 피해자라는 것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 이런 왜곡은 소련 뿐만 아니라 서구 연합군의 승인을 받았고, 이는 오스트리아가 양측 중 어떤 진영으로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약속의 선물이었다.

 

Autre différence avec l’Allemagne : la dénazification. Dans ce pays, celle-ci fut entreprise par les Alliés, alors que les Autrichiens eurent le droit de se « dénazifier » eux-mêmes. Très sévère la première année (quarante-trois condamnations à mort et trente exécutions ; perte d’emploi et des droits civiques), la répression se relâcha vite, pour disparaître dès 1948. Cette année-là, les six cent mille anciens membres du Parti nazi autrichien recouvrèrent leurs droits civiques. De nouvelles élections nationales approchaient, et les dirigeants du Parti social-démocrate autrichien (SPÖ) comme les chrétiens-démocrates du Parti populaire autrichien (ÖVP) se lancèrent dans une course nauséabonde aux voix des anciens nazis. Un nouveau parti fut créé, l’Union des indépendants (VdU), destiné à capter ces votes (4). De ces six cent mille voix, chacun de ces trois partis recueillit un tiers.

 

독일과의 또 다른 차이 : 탈나치화다. 이 나라에서, 연합국의 관리하에, 오스트리아인들은 스스로 탈나치화 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게 된다. 초기에는 매우 가혹했고 (43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30명이 처형을 받았고, 나머지 전범들은 직업을 잃고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탄압은 곧 느슨해졌고, 1948년부터 사라지게 되었다. 바로 이 해에, 60만명의 옛 오스트리아 나치 당원들이 공민권을 회복했다. 새로운 선거가 다가왔고, 오스트리아의 각 정당들은 옛 나치 당원들의 표를 얻기 위한 구역질 나는 경쟁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독립연맹당이라는 신당이 출범했고, 이 나치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한 정당이었다. 60만표를 놓고, 각각의 세 정당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오스트리아 기독 민주당, 오스트리아 인민당) 1/3씩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La thèse d’une Autriche première victime de Hitler s’imposa dans toute la société. Pendant des décennies, les manuels scolaires n’évoquèrent, pour la période 1938-1945, que la guerre en Europe, tandis que la seule mention de l’Autriche se focalisait sur les quelques tentatives de résistance, la plupart individuelles. L’affaire Kurt Waldheim aurait pu faire exploser le couvercle. Il n’en fut rien : les Autrichiens firent bloc derrière cet ancien officier de la Wehrmacht, élu président de la République en 1986, accusé d’avoir participé à la déportation de Juifs dans les Balkans, qui déclara : « Je n’ai fait que mon devoir ! » Waldheim est mort dans l’indifférence internationale, le 14 juin 2007, et a eu droit, dans son pays, à des funérailles nationales.

 

오스트리아가 히틀러의 첫번째 희생자라는 신화는 전사회적으로 수용되었다. 이후 수십년 동안, 역사교과서들은 1938-1945년 시기에 대해, 유럽의 전쟁만을 서술했을 뿐이고,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몇몇 저항 시도에 대해서만 언급했을 뿐이지만, 이러한 저항은 대부분 미미했던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쿠르트 발트하임 사건이 발생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이 이 전직 독일군 장교를 두둔했던 것이다. 그는 1986년 공화국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전쟁 중 발칸반도에서 유대인 강제이송에 가담했다는 비반을 받은 바 있었고,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나의 명령만을 따랐을 뿐이다발트하임은 국제적 무관심속에서 2007 6 14일에 사망했고, 이 나라에서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되었다.

 

Grâce notamment aux travaux pionniers d’Erika Weinzierl et de Botz, suivis aujourd’hui par ceux de Bertrand Perz et d’Olivier Rathkolb, les manuels ont commencé, il y a à peine dix ans, à décrire la participation profonde des Autrichiens au nazisme. Mais des sondages, effectués récemment, montrent qu’un long chemin reste à parcourir. Lorsque l’on demanda : « L’Autriche aurait-elle dû s’engager dans une résistance armée à l’Anschluss ? », à peine une grosse moitié des personnes interrogées en 2008 répondirent positivement (53 %, contre 41 % de « non »). En 2005, la question : « Le national-socialisme en Autriche constitue-t-il un épisode comportant des bons et des mauvais côtés ? » recueillait 44 % de « oui » contre 20 % seulement qui considéraient que cet épisode ne fut que négatif (5).

 

에리카 빈지엘 과 보츠의 선구적인 연구와 베르트랑 페르츠와 올리비에 라트콜브의 최근 연구 덕분에, 10년전부터 역사 교과서들이 오스트리아인들이 나치즘에 중요한 가담을 했다는 점을 기록하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에 실시된 여론조사들은 아직도 갈 길이 멀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스트리아인들이 강제합병때 무장항쟁을 벌여야만 했다고 보는가와 같은 2008년의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절반인 53%만이 긍정적으로 답변했고, 41%는 부정적으로 답변했다. 2005, «오스트리아 국가사회주의는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진 사건이었나라는 질문에 대해서, 44% «»라고 답했고, 단지 20%만이 이 사건이 단지 부정적이었을 뿐이라 답변했던 것이다.

 

Les lieux de mémoire autrichiens offrent de nombreux exemples de cette tolérance avec le passé nazi. A Vienne, une partie du Ring, ce boulevard prestigieux qui entoure le centre historique, continue de porter le nom de Karl Lueger, maire de la ville de 1897 à 1910, mais surtout fondateur du Parti chrétien-social, le premier parti de masse antisémite d’Europe, une référence idéologique fondamentale pour le jeune Adolf Hitler. Des statues se dressent à son effigie, une église porte son nom, sans que personne s’en émeuve.

 

오스트리아의 역사기념 공간들은 나치라는 과거에 대한 이 같은 관대함의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빈에서, 이 도시의 역사 관광지를 둘러싸고 있는, 링 가의 일부는 여전히 칼 루거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그는 1897-1910년 동안에 이 도시의 시장이었지만, 특히 사회 기독당의 창립자였고, 이 당은 반유대주의를 표방하는 유럽 최초의 대중 정당이었고, 이것이 청년 아돌프 히틀러에게 미친 영향이 막대했던 것이었다. 그의 동상들이 도처에 서있고, 그의 이름을 가진 교회도 있지만, 누구도 이 사실에 주목하지 않고 있다.

 

A Klagenfurt, sur la Domplatz, le seul monument à la mémoire des victimes de la seconde guerre mondiale dénonce les exactions des... partisans antinazis slovènes.

 

클라겐푸르트의 돔광장에, 2차세계대전의 희생자들을 위한 유일한 기념비는 슬로베니아 출신 반나치 운동가들의 처형만을 비난하고 있을 뿐이다.




덧글

  • 아브공군 2010/02/22 21:37 # 답글

    의외의 사실을 알았습니다.....
  • hyjoon 2010/02/22 22:12 # 답글

    같은 게르만계열이니 저런 성향이 나타나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군요.
  • ... 2010/02/24 14:13 # 삭제

    게르만으로 따지면 발트 3국이나 덴마크, 룩셈부르크 등도 게르만입죠. 앵글로색슨족도 게르만의 일파이니 영국도 게르만이고 복지국가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도 게르만입니다.
  • 행인1 2010/02/22 22:49 # 답글

    사실 오스트리아 내에도 나치들이 독일 못잖게 활동하고 있었죠. 슈슈니크 수상의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를 통제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합니다.
  • .... 2010/02/23 09:27 # 삭제 답글

    뭐 의외랄 것 까지야.. 내 유대인 친구들은 사운드 오브 뮤직을 보면서 입에 거품을 물던데;;
  • dsas 2010/02/23 09:49 # 삭제 답글

    중국인들도 한국이 독립운동을 열심히 했던 나라라고 왜곡하는거 보면 거품물듯 ㅋ 오죽 조선인들이 일제에 협력했으면 카오리빵즈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 네비아찌 2010/02/23 11:19 # 답글

    본문에도 나왔지만 ss장교 출신 쿠르트 발트하임이 무려 유엔 사무총장에 오스트리아 대통령까지 지냈으니 말이죠.
    일본제국의 심리적 잔재가 현재의 일본국보다는 한국과 북한에 더 많이 남아있는 것과 비슷하려나요?
  • xavier 2010/02/24 10:29 # 삭제

    네비아찌님//
    발트하임는 돌격대(SA) 출신으로 국방군 정보부 장교로 복무했다고 위키에 나와있네요. 뭐 그게 그거지만. (긁적긁적....)
  • 네비아찌 2010/02/24 10:32 #

    앗, 제가 실수했군요. 죄송^^;
  • 어릿광대 2010/02/23 12:46 # 답글

    이건 좀 충격이군요;;;
  • robarobo 2010/02/23 17:30 # 삭제 답글

    독일에서도 종전후 서독에서는 탈나치 과정에서 미국은 상당히 관대한 처분을 주장하여 소련과 많이 부딪혔지요.흑백영화 '뉴른베르그 재판'에도 그런 대사가 나오지요.반공을 위해선 좀 느슨해져야 한다는....특히 법조계에는 나치에 협력한 이가 거의 살아남았지요.
  • 파리13구 2010/02/24 09:07 # 답글

    아브공군 님
    저도 마찬가집니다.

    hyjoon 님
    그렇군요.

    행인1 님
    독일에 비하면,오스트리아 나치문제가 잘 부각되지 못한 것 같습니다.

    .... 님
    친구들이 거품을 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dsas 님
    ...

    네비아찌 님
    전쟁 후에도, 나치 전범 출신들이 출세가도를 달린 것을 보면,
    과거청산 문제는 오스트리아나 일본,한반도 어디에서도 앞으로 문제가 될 듯 합니다.

    어릿광대 님
    충격입니다.

    robarobo 님
    네, 나치 출신을 배제하면, 재판부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할 정도라 하니,
    독일 사법부가 어느정도 이 범죄적 정권에 협력했는지 알 수 있을 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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