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델라 석방20주년-투쟁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Encyclopedie

'화해가 만델라의 최대 업적이자, 그가 남긴 불행한 유산인 이유는?'
화해에 대한 집착이 집단적 히스테리가 되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타헤이트 반대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넬슨 만델라는 1990 2 11일 석방되었다. 이후 사회에 닥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인종주의 체제에 의한 상처들은 아직도 남아있고, 아직도 해결이 요원하다고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더 선데이 인디펜던트 지 보도


Le combat contre l’apartheid n’est pas terminé

Nelson Mandela a été libéré le 11 février 1990. Malgré les bouleversements survenus dans la société, les blessures infligées par le régime raciste restent vives et difficiles à résorber.

11.02.2010 | Kholofelo Mashabela | The Sunday Independent


 

C’est comme si c’était hier. Le 11 février 1990. des milliers de personnes avaient envahi les rues du Cap pour apercevoir la personnalité qui s’était battue si longtemps pour la liberté. Les autres étaient collées devant leur télévision pour regarder ce qui devait ressembler à un moment incroyable pour le pays, celui où ­Nelson Mandela allait faire son entrée sur le devant de la scène politique de son pays et du monde. Une hystérie collective s’est alors emparée de la population noire et de certains Blancs.

 

1990 2 11일이 마치 어제의 일처럼 느껴진다. 그 날에, 수 천명의 사람들이 케이프타운의 거리에 쏟아져 나왔고, 이것은 자유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온 한 인물을 보기 위해서 였다. 다른 사람들은 텔레비전 앞에 앉았고, 이것은 이 나라의 믿을 수 없는 순간을 지켜보기 위해서 였고, 바로 그 순간, 넬슨 만델라가 나라와 세계의 정치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가 흑인 국민 과 몇몇 백인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On ne sait pas très bien qui a écrit le scénario, mais cela a marqué le début d’une tendance à gérer le processus politique par l’hystérie. La dernière manifestation en est la fièvre qui entoure l’organisation de la Coupe du monde de football, qui aura lieu du 11 juin au 11 juillet. Avant, il y a eu la Convention pour une Afrique du Sud démocratique (CODESSA) et ce qu’elle a apporté. Il y a eu la violence dont ont été victimes les communautés noires. Il y a eu les révélations sur les activités du Bureau pour la coopération civile (CCB). Bien sûr, il y a eu la Vlakplaas [unité secrète antiterroriste pendant l’apartheid]. Il y a eu aussi l’établissement de la Commission électorale indépendante, qui a ouvert la voie aux premières élections démocratiques, peut-être le résultat le plus significatif de février 1990. Puis sont arrivées la reconnaissance internationale et l’acceptation de l’Afrique du Sud en tant que pays dirigé par des Noirs. Il y a eu aussi la Coupe du monde de rugby, en 1995… En somme, un mélange de bon et de mauvais. Tous ces événements ont chaque fois produit le même effet sur notre peuple : celui de réveiller ­l’hystérie collective.

 

우리는 누가 이런 시나리오를 연출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것은 히스테리에 의해 주도되는 정치일정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것에 대한 최근의 증거는 다가오는 6 11– 7 11일에 열리는, 월드컵 개최를 둘러싼 열광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증거들로는, 그 이전에, 남아프리카 민주주의를 위한 위원회 와 그 활동이 빚어낸 결과들에 대한 열광이 있었다. 흑인공동체가 희생자였던 폭력도 있었다. 시민 화합을 위한 위원회 활동 조사결과 보고도 있었다. 물론, 블락프라스, 즉 아파르트헤이트 동안 반테러활동을 담당한 비밀조직에 대한 조사도 있었다. 독립 선거관리 위원회가 조직되어, 최초의 민주주의적 선거를 위한 길을 닦았다는 것이 아마도 1990 2월의 가장 의미있는 결과물일 지도 모르겠다. 이후, 흑인이 통치하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정과 승인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1995년 럭비 월드컵도 있었다... 요약하자면,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모두 있었다. 이런 모든 사건들이 매번 우리 국민들에게 유사한 영향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집단적 히스테리를 고무시킨 것이다.

 

A ce moment de notre histoire, la communauté internationale s’est bousculée pour faire de Nelson Mandela un citoyen du monde. L’euphorie se ressentait à plusieurs égards. Le régime de l’apartheid et le Congrès national africain (ANC) s’étaient autoproclamés les acteurs les plus importants de l’accord négocié qui devait suivre. Par conséquent, toute tentative de constituer un front uni des mouvements de libération était vouée à l’échec. Dans l’accord négocié qui a suivi, la question de la terre fut éludée. Il fut décidé que les terres dont les Noirs avaient été dépossédés avant 1912 ne leur seraient pas rendues et que celles qui leur avaient été prises après 1912 ne seraient restituées que sur la base d’un contrat de vente volontaire. C’est probablement en partie pour cela que la société sud-africaine est aujourd’hui l’une des plus inégalitaires au monde en termes socio-économiques.

 

우리 역사의 바로 이 국면에서, 국제사회는 넬슨 만델라를 국제 시민으로 앞다투어 존경을 보냈다. 모든 면에서 행복이 감지되었다. 아파르타헤이트 체제와 아프리카 민족회가 이후의 협상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협상주체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해방운동을 위한 단일대오를 형성하고자 했던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갈 운명이었다. 이렇게 이후 협의를 통해서 합의가 도출되는 과정에서, 역사적인 토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불가능해 졌다. , 1912년 이전에, 흑인들이 빼앗긴 땅들이 그들에게 반환되지 않았고, 1912년 이후에 그렇게 된 땅들은 자발적 판매계약을 통해 조정된다고 결정된 것이다. 이 결정 때문에, 적어도 부분적으로, 오늘날의 남아프리카 사회가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들 중 하나가 된 것이 아닐까 한다.

 

Car, après février 1990, la réconciliation est devenue une priorité. Si le concept était noble en soi, cela signifiait cependant que la justice ne serait pas rendue. Les personnes coupables de violences institutionnelles envers les Noirs ne seraient pas traduites en justice. Pis, les activités des combattants de la libération seraient jugées suivant les mêmes critères que celles des partisans de l’apartheid. Toujours dans ce désir de réconciliation, Nkosi Sikelele Afrika, l’hymne africain de l’espoir, a été mis sur le même niveau que Die Stem, un chant qui célèbre les objectifs de la rébellion [boer] de Slagtersnek [1816]. On a fusionné les deux chants pour créer l’hymne national sud-africain, que la plupart des gens semblent ne pas pouvoir ou ne pas vouloir chanter dans son intégralité.

 

왜냐하면, 1990 2월 이후, 화해가 지상과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개념 자체는 고귀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것은 결국 정의가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흑인에 대해 제도적인 폭력을 행사했던 범죄자들이 사법심판을 받지 않았다고 본다. 보다 안좋았던 것은, 해방을 위한 투쟁활동이 아파르트헤이트 폭력 가해자들의 활동과 동일한 선상에서 사법심판을 받았다는 점이다. 항상, 화해에 대한 열망 속에 매몰된 나머지, 아프리카인의 열망을 담은 노래인 <은코시 시켈레레 아프리카> 1816년 보어 반란 동안 유명해진 노래인 <디 스템>같은 노래와 동일한 선상에서 평가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두 노래를 혼합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가를 만들었고, 그 결과, 대다수 사람들이 전곡을 부를 수도 없고, 부르지도 못하는 애국가가 만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Dans la course aux premières élections démocratiques, en 1994, certains événements ont commencé à attirer l’attention sur la corruption de la société dans laquelle nous vivons aujourd’hui. Avec l’établissement de la Commission électorale indépendante, on s’est empressé de recruter un personnel suffisamment étoffé pour gérer des élections sur une grande échelle. Cela n’a pas été une mince affaire. Auparavant, seule une infime partie de la population sud-africaine avait le droit de vote. Tout d’un coup, des millions d’entre nous ont pu voter. Au moment où les élus prenaient leurs fonctions et où nous apprenions combien ils gagnaient, nous avons vu que l’éthique était jetée aux orties et que les graines de la corruption avaient été semées.

 

1994년 최초의 민주적 선거운동 과정에서, 몇몇 사건들이 주목을 끌기 시작했고, 이것은 우리가 오늘날 살고 있는 사회의 부패와 관련된 것이었다. 독립 선거 관리 위원회 설치 덕분에, 우리는 대규모 선거를 관리하기 위해 능력이 충분한 인물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작은 사건이라 볼 수 없다. 과거에, 남아프리카의 소수 국민만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갑자기, 우리들 중 수백만명이 투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당선자들이 공직 수행을 시작하고, 그리고 우리가 그들이 얼마나 버는 지 알게 될 때마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공직자 윤리가 사라졌다는 것과 부패의 씨앗들이 곳곳에 뿌려졌다는 사실들 뿐이다.

 

Si le contenu de cet article met le lecteur mal à l’aise, c’est peut-être parce qu’il est temps que quelqu’un fasse remarquer que le roi est nu. Mais ces propos auront-ils le moindre effet, compte tenu de l’hystérie qui entoure le vingtième anniversaire de ce fameux mois de février 1990 ?

 

만약 이 기사의 내용이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가 <임금님은 벌거숭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독자들이 이 글을 보고도 별다른 반향을 느끼지 못한다면, 1990 2월의 그 유명한 사건에 대한 20주년 맞이한, 오늘날 남아프리카 사회에, 히스테리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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