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히틀러가 산 독재자들에게는 악몽이 된 방법은? ^ ^ Le monde



외교사라는 시각에서 보면, 삼국지의 제갈공명만이 죽어서 중달 같은 적을 엿 먹인 것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도 죽어서 국제정치에 큰 교훈을 남겼으니, 그것은 바로 국제사회의 악당 독재자가 될 싹이 보이는 자들은 초기에 제압해야 한다는 논리의 등장이고, 이 역사에서 히틀러가 제갈공명이었다면, 중달은 이후의 사담 후세인 같은 독재자들 이었다. 1930년대 당시 영국의 체임벌린이 주장한 유화론은, 이후 냉전과 최근의 테러와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겁쟁이와 동의어가 되었다.

 

이렇게 1938 9월의 뮌헨협정 이후, 한 독재체제에 맞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전략에서 유화론은 그 힘을 잃고, 강경론이 득세하게 된 것으로 보이고, 이러한 시대분위기는 이후 소설에서도 확인가능한 것이다.

 

가령, 마리오 푸조의 <대부>에서 주목할만한 대목은 돈 코를레오네의 막내 아들 마이클 (영화에서 알 파치노) 이 소설의 중요인물로 급부상하는 장면이다. 마이클이 아버지 암실기도의 원흉인 버질 솔로조와 그의 협력자 맥클러스키 경찰서장을 죽이는 장면은 단연 <대부> 1부의 핵심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마이클은 가문의 '계집애'에서 돈 코를레오네의 아들이자 더 나아가 그의 화신으로 거듭나게 된다. 즉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전형적인 그리스 비극의 캐릭터가 되는 것이다.

이 장면이 흥미로운 것은, 이 피어린 복수를 뮌헨협정의 역사적 경험을 빌어 합리화 시키는 대목이었다. 뮌헨협정이 1938년 체코의 주덴텐란트를 독일에게 할양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 간에 맺어진 조약이라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그리고 뮌헨에서 히틀러를 꼼작 못하게 누르지 못하고 나약하게 양보한 것은 이후 재앙의 씨앗[2차 세계대전]이 되었다는 것이 협정에 관한 교훈이라 할 수 있겠다. 소설은 마이클의 복수를 재앙의 씨앗을 미리 도려내는 과감한 행동이었다는 관점에서 묘사한다. , "코를레오네 패밀리가 국정을 운영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않았을 것이다
." ^^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와 현재에 "뮌헨협정"이란 교훈이 초래할 수있는 망상에 대한 것이다. 뮌헨협정은 협상이 아닌 무력으로 자신의 적을 초장에 제압하기를 원하는 매파들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논거로 기능해 왔다.실제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시에도 쿠바를 선제공격해야 한다는 매파 논리의 중심에는 이 교훈이 있었다. 독재자에 대한 양보는 화만을 키운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리오 푸조식의 논리는, 청년 시절 케네디도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미국대통령이 되는 케네디는, 1940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했고, 그때 학위논문으로 제출한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 Why England Slept(1940),1930년대 히틀러의 독일에 대비한, 영국의 군사적 무방비상태를 논한 것으로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간략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외정책에 대한 케네디의 세계관을 결정지은 것은 1930년대에 대한 그의 연구를 통해서 였다. 그는 당시 국제문제의 핵심을, 아돌프 히틀러의 팽창주의적 야망을 서구세계가 제지하는데 실패한 데 있다고 보았고, 이 실패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케네디는 이 논문에서, 당시 독일에 대한 영국의 취약성을 세밀하게 고찰하고 있다. 1940년에 발간된 이 논문, <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는 외교와 국방정책에 대한, 젊은 시절 케네디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이 논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영국과 같은 민주주의 체제 와 나치 독일 같은 전체주의 체제를 상호 비교하는 것이었다. 케네디의 시각에서, 당시의 영국 정부는 군사력 증강에 반대하는, 다양한 이해집단들과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반면, 히틀러는 이런 압력들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독일 정부는 아무런 장애 없이 군비지출을 늘릴 수 있었지만, 이에 반해 런던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930년대 말에 이르면, 영국의 방위력은 독일의 도전과 그의 강력한 군사력이라는 도전에 직면에서, 무기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리고 있다. 전체주의 세력에 직면해서, 자유민주주의는 의도적인 힘을 가져야만 하고, 군비지출을 늘려야 한다는 명확한 비전을 확립해야만 하고, 비타협적 전망을 가지고, 이에 대한 국내여론이 어떤 것이든, 거친 대응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강경한 대외정책론은 이후, 소련과의 대치국면에서 케네디의 기본방침으로 자리잡게 된다. 물론, 이후 이 생각을 어느 정도 수정하기는 하지만, 대통령이 된 케네디가, 후루시초프의 소련을 상대하는 기본 시각은, 마치 자신이 1930년대로 돌아가서 나치 독일을 상대한다는 가정하에서, 그 기본적 관점이 나온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사담 후세인,피델 카스트로,아마디네자드,김정일 등, 미국이 적이라 생각하는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아돌프 히틀러로부터 덕 아닌 덕을 지금까지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이 약간은 억울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까? 특히, 사담 후세인 같은 경우는 그럴 것 같다. 1930년대 서방은 히틀러 독일의 군비수준을 과소평가해서 재앙을 초래했다면, 조지 W. 부시가 주도한 테러 동맹은 사담의 군사력을 지나치게 과도평가한 측면이 분명히 있고, 이런 과잉대응을 추진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에는, 항상 뮌헨협정에 대한 정치적 이용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죽은 히틀러가 사담 후세인을 잡았다!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전세계 모든 독재자들에게 아돌프 히틀러 만한 역사적 원수는 없을 것 같다. ^ ^









덧글

  • dunkbear 2010/01/03 13:51 # 답글

    2차 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참전한 마크 클라크 장군의 회고록인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보면 2차 대전 후 오스트리아를 같이 분할 점령 중이던 소련군이 연합군을 상대로 문제를 일으켰을 때 위에서 묘사한 것과 같은 강경책으로 밀어붙여서 잠재웠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 안나는데 아마 연합군 점령지대를 소련군 전투기가 함부로 날아다니자 연합군 쪽에서도 전투기를 띄워서 맞불을 놓았다던가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뭐...

    사실 히틀러는 자국과 자신을 내걸고 '도박'을 할 정도로 담대하거나 아니면 미친 독재자로 한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인물이었습니다. 독일이 전격전 등으로 엄청 강하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지만 사실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영국이나 프랑스가 절대 뒤지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이 불리한 요소가 많았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뒤 후세인이나 그외 다른 독재자들은 고작해야 국지전을 제외하고는 정권 보존에 급급한 수준이었죠. 이런 독재자들은 널리고 널렸죠. 6.25를 일으켰던 김일성도 있지만 미국의 에치슨 정책이나 남한의 당시 군사력을 감안하면 6.26 도발을 '도박'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 파리13구 2010/01/03 14:02 #

    역시 따지고 보면, 진짜 강자에게는 무기력하다가,

    만만하거나, 취약한 약자에는 지나치게 막나간 정책이 바로 매파식 강경책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 ^
  • rumic71 2010/01/03 14:19 #

    전략전술이나 기술면에서는 독일이 짱짱했지만 보급 물자나 생산력에서는 영미를 따라잡을 수가 없었지요.
  • 다복솔군 2010/01/04 01:19 # 답글

    실제로 복거일옹이 이 뮌헨협정을 대북강경책의 근거롤 줄기차게 활용했지요. 그의 희곡인 <그라운드 제로>에서는 김대중-노무현을 풍자한 인물인 티모시 골드슈타인이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맞나?) 등의 체임벌린의 말을 수차례 사용하니까요.여하간... 사실 체임벌린의 삽질도 문제였지만 서부전선에서 프랑스나 영국이 전쟁 시작 직후 스탈린을 믿지 않고 즉각적인 행동을 취했다면 달라졌으리란 예측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많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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