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유럽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Le monde



"Que signifie pour moi être européen ?"

[유럽]오늘날 유럽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작가인, 호르헤 셈프런이 우리를 유럽대륙의 지성사를 대표하는 세개의 장소로의 여행으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Pour répondre à la question, l'écrivain Jorge Semprún nous invite à un voyage dans trois lieux emblématiques de l'histoire intellectuelle du continent.



 

12.12.2002 | Jorge Semprún | El País

 

스페인 마드리드 엘 파이스 지 보도

 

Pour mettre de l'ordre dans mes idées sur l'Europe, je souhaite entreprendre trois voyages intellectuels afin de tenter d'aborder sa réalité d'un point de vue culturel et historique.

 

유럽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세 장소로의 지식 여행을 하고자 희망한다.

 

Prague : "l'héroïsme de la raison" d'Edmund Husserl En mai 1935, à Vienne, un vieux philosophe allemand nommé Edmund Husserl donne une conférence intitulée "La crise de l'humanité européenne et la philosophie". Il a fui son pays natal parce qu'il est juif. Ses propos sont émaillés de termes abstraits et rigoureux. Il parle de philosophie alors que la crise européenne est en gestation et se pose une question cruciale : que représente l'Europe aujourd'hui ? Sa première réponse est que l'Europe est surtout une entité spirituelle et qu'elle n'est pas liée à un territoire. "J'entends l'Europe non pas géographiquement comme sur les cartes, dit-il. Au sens spirituel, il est manifeste que les dominions britanniques et les Etats-Unis appartiennent à l'Europe." On comprend immédiatement à quoi Husserl fait allusion lorsqu'il parle de l'identité spirituelle de l'Europe : une longue tradition de pensée, de critique au sens large, qui puise ses racines dans notre histoire culturelle.

 

프하라 : 에드문트 후설의 «이성이라는 영웅». 1935 5, 오스트리아 빈에서, 에드문트 후설이라 불리는 한 늙은 독일 철학자가 «유럽적 인간성과 철학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서 도망쳤다. 그의 강연은 추상성 과 준엄하다는 점에서 광채를 휘날렸다. 그는 철학에 대해 이야기했고, 유럽의 위기가 진행 중이며, 본질적인 질문을 제기했다 : 오늘날 유럽을 대표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첫 번째 답변은 유럽이 우선 정신적인 단위이며, 유럽이 영토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지적이었다. «나는 유럽이 지리적으로 지도 위에 표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라고 그가 말했다. 정신적 차원에서, 영국과 미국도 유럽에 속한다고 그가 주장했다. 우리는 그가 유럽의 정신적인 정체성에 관해 이야기 할 때, 후설이 무엇에 대해 은유 했는지에 대해 즉시 이해할 수 있다 : 사유와 광범위한 의미로의 비판이라는 유구한 전통이 우리 유럽의 문화적 역사의 뿌리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인 것이다.


L'Europe d'Edmund Husserl n'est pas liée à un morceau de terre ni à l'idée de nation. Le concept de supranationalité est d'ailleurs la deuxième idée importante de son discours : c'est la première fois qu'un philosophe européen le définit clairement. Husserl défend une transformation digne de ce que l'Europe a de meilleur, une supranationalité d'un type nouveau, qui naîtrait de son extraordinaire force spirituelle. Les nations, affirme-t-il, ne s'unissent qu'en raison des impératifs du commerce et de la lutte perpétuelle entre les pouvoirs, et il faut aller au-delà.

 

에드문트 후설의 유럽은 땅조각도, 민족이라는 관념도 아니다. 초민족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그의 강연의 두번째 중요 개념이었다 : 이는 최초로 한 유럽 철학자가 그것을 명확하게 정의한 것이었다. 후설은 유럽이 최상의 성질을 가진 것으로의, 고상한 전환을 옹호했고, 이는 새로운 종류인 초민족체유럽 이었던 것이고, 이것이 자신의 독특한 정신적 힘을 탄생시킬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의 시각에서, 민족들은 상업적인 명령이라는 이유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권력들 간의 영원한 투쟁들만을 초래할 뿐인 존재들에 다름 아니었고, 따라서 이를 넘어서야만 했다.

 

La troisième idée du philosophe dans ce texte si riche est que la crise européenne de 1935 ne peut se résoudre que de deux manières : on assistera soit à la chute de l'Europe - celle-ci "se rendant toujours plus étrangère à sa propre signification rationnelle" et sombrant "dans la haine de l'esprit et dans la barbarie" -, soit à sa renaissance spirituelle grâce à "l'héroïsme de la raison". On pourrait reprocher à l'auteur une ligne de pensée aussi abstraite et impossible précisément sur un point aussi important de la discussion. Une philosophie idéaliste de la volonté comme seul et unique remède contre la désintégration de l'Europe ? Une proposition assurément trop confuse.

 

이러한 맥락에서 너무나 풍요로운 이 철학자의 세번째 생각은 1935년 유럽의 위기가 2가지 방법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 우리는 유럽의 붕괴를 목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다. 즉 이것은 이성적 차원에서 가장 기묘한 것이며, 이것은 정신의 증오 와 야만에 빠져드는 것이다. 아니면, «이성의 영웅주의»덕분에, 우리가 정신의 르네상스를 목도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다른 하나다. 우리가 이 철학자를 다소 추상적인, 일련의 사유의 흐름 속에 위치시키는 것은 가능하지만, 토론만큼 중요한 어떤 논점을 정확히 집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의지를 이상화시키는 철학이, 유럽의 해체에 맞서는 유일하고 독특한 치유가 될 수 있을까 ? 확실히 너무 혼란스러운 제안이다.

 

"L'héroïsme de la raison" a beau être un concept abstrait, il peut nous aider à développer une métaphore historique très intéressante et concise. En 1935, dans la fameuse salle de conférences de Vienne, se trouvait un jeune étudiant en phénoménologie tchèque nommé Jan Patocka. Quelques mois plus tard, celui-ci organisa dans la même ville son propre cycle de conférences, où il reprit les idées d'Edmund Husserl sur l'Europe. Patocka, qui n'avait pas trente ans à l'époque, est l'une des figures les plus intéressantes et injustement oubliées de la philosophie européenne. Il suit des cours à l'université de Prague, mais le nazisme, puis le régime communiste (à partir de 1948) l'empêchent de terminer ses études. Il est, avec Vaclav Havel et Jiri Hajek (ministre des Affaires étrangères pendant le bref "printemps de Prague"), l'un des signataires de la Charte 77, le mouvement des intellectuels dissidents tchécoslovaques. Il meurt le 13 mars 1977 à l'âge de soixante-dix ans, après un interrogatoire un peu "poussé" de la police communiste. Le jour de son enterrement, les hélicoptères des forces de l'ordre survolent le cimetière pour éviter que la foule n'assiste à la cérémonie. Les autorités ont fait fermer tous les fleuristes de Prague pour que personne ne puisse acheter des fleurs et les porter sur sa tombe. Cette métaphore est pour moi d'une grande force. Quand on pense que, dans sa jeunesse, ce philosophe avait écouté à Vienne une conférence sur la lutte spirituelle et philosophique pour la survie de l'Europe, la lutte contre la barbarie et la fin de la vie de spirituelle !


«
이성의 영웅주의»는 너무 추상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매우 흥미있고, 구체적인 역사적인 은유를 발전시켜 나가는 편이 우리에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1935,이 날의 빈의 회의장에는, 얀 파토츠카 라는 이름의 체코의 현상학 전공 젊은 대학생이 참석했다. 몇 달후, 이 체코 철학도는 같은 도시에서 자신의 강연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유럽에 대한 에드문트 후설의 이론을 다시 강조했다. 파토츠카는 당시 서른 살이 채 안된 청년이었지만, 가장 흥미 있는 철학도들 중 한 명 이었고, 부당하게도 유럽철학에서 잊혀진 존재이다. 그는 프라하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했지만, 나치즘과 이후 1948년에 공산주의 체제가 도래하면서, 학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하벨 과 하젝 [짧은 «프라하의 봄»당시 외무부 장관]등과 더불어, 77헌장을 공동 서명한 사람들 중 한명이고, 이 지식인 운동이 체코를 뒤흔든 바 있다. 그는 70세의 나이로, 1977 3 13일에 사망했고, 공산당 경찰의 강제적인 조사를 받은 직후였다. 그의 장례식 당일, 공권력의 헬기들이 공동묘지 주변을 선회비행했고, 이는 대중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당국은 프라하의 모든 꽃가게들을 폐쇄했고, 이는 아무도 꽃을 살 수 없게 해서, 꽃들을 그의 무덤에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이야기가 내게는 매우 호소력 있게 다가온다. 그의 이러한 투쟁이 가능했던 것은, 젊은 시절에, 이 철학자가 비엔나에서, 유럽의 생존을 위한 정신적 철학적 투쟁 과 야만에 대한 투쟁 그리고 정신적 삶의 종말에 대한 강연을 들었던 것이, 이후 그의 삶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Weimar et Buchenwald : l'Europe contre l'Europe Empruntons maintenant une autre route pour appréhender ce qui me semble essentiel dans la culture spirituelle de l'Europe. Weimar, une petite ville allemande possédant une longue et importante histoire politique et culturelle, est peut-être l'un des lieux les plus appropriés pour réfléchir sur l'Europe, voire sur le monde. Dans une île située sur la rivière qui jaillit du terre-plein où s'élèvent les murs de la vieille ville se trouvent la résidence d'été et le jardin de Goethe. Là, entourés des souvenirs de cet homme, qui fut un grand Européen et l'un des défenseurs du cosmopolitisme dans son sens le plus profond, nous pouvons méditer sur ce qu'il est advenu de l'Europe.

 

독일의 바이마르 와 부헨발트 : 유럽에 대항한 유럽. 이제 유럽의 정신 문화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을 배우기 위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보자. 바이마르 는, 독일의 작은 도시로, 유구하고 중요한 정치사와 문화사를 가진 곳으로, 유럽 과 세계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서는 매우 적당한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강의 한가운데 솓아오른 섬 위에 있는 평지에, 성벽으로 둘러 쌓인 옛 도시가 있고. 이곳에 바로 괴테의 여름별장과 정원이 있다. 바로 이곳에, 이 위인의 추억들이 서려있고, 이 괴테는 위대한 유럽인이었고,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사해동표주의의 옹호자들 중 한 사람이었고, 우리는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명상에 잠겨볼 수 있는 것이다.

 

L'endroit est vraiment extraordinaire. Weimar n'est pas seulement une ville qui a été "capitale culturelle de l'Europe" en 1999 et où l'on peut, après un arrêt à la résidence d'été de Goethe, aller consulter les archives de Schiller ou de Nietzsche ; elle est aussi située à quelques kilomètres de l'ancien camp de concentration nazi de Buchenwald. Une proximité étrange et très instructive à la fois.

 

이곳은 정말 특별한 곳이다. 바이마르가 단지 1999년 유럽의 문화수도 였기 때문에 이 도시가 특별한 것만은 아니고, 괴테의 여름별장을 방문한 뒤, 우리는 쉴러 와 니체 문서고에서 자료를 열람할 수도 있다 : 이 문서보관소는 나치의 옛 강제수용소였던 부헨발트 수용소에서 수 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런 인접성은 기이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매우 교훈적이다.

 

Cette coïncidence nous sert de "raccourci" pour appréhender l'histoire politique et culturelle de l'Allemagne. Dans les années 20, Weimar fut le lieu où l'Assemblée nationale allemande se réunit pour la deuxième fois seulement dans l'histoire du pays, afin d'élaborer une Constitution qui finira par donner naissance à la république de Weimar. Les délégués tentèrent de créer une pépinière de démocratie parlementaire, que les nazis finirent par détruire, l'enterrant sous leurs ossuaires. Aujourd'hui qu'ont disparu aussi bien la république de Weimar que le camp de Buchenwald, nous pouvons entrevoir ce que signifie l'Europe : un rempart édifié précisément contre le fascisme et le stalinisme. Ce rôle était déjà évident lorsque le camp de Buchenwald commença à fonctionner, en 1937. Ce furent d'abord les opposants politiques allemands, communistes et sociaux-démocrates, qui le remplirent. Puis il devint un camp international dans lequel tous les peuples d'Europe étaient représentés. Mais il ne s'agissait pas d'un camp d'extermination comme ceux d'Auschwitz ou de Birkenau. A Buchenwald, il n'y avait pas de chambres à gaz. On y détruisait les prisonniers par les travaux forcés, pas par élimination soudaine.

 

바로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우리로 하여금 독일의 정치,문화의 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해준다. 1920년대에, 바이마르 는 독일역사에서 단지 두차례만 열린, 독일 국민 의회가 열렸던 곳으로, 이 의회는 바이마르 공화국 탄생으로 귀결되는 , 헌법을 만들기 위한 모임이었다. 대표들은 의회민주주의의 토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는 나치에 의해 파괴될 운명이었고, 나치에 의해 무덤에 매장되게 된 민주주의였다. 물론 오늘날, 부헨발트 수용소도 바이마르 공화국도 사리지고 없지만, 우리는 이를 통해 유럽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다 : , 유럽이란 파시즘 과 스탈린주의에 맞서는 성채라는 것이다. 이 역할은 1937년에 부헨발트 수용소가 그 가동가 시작했을 때 이미 명확했다. 우선 이 수용소를 채운 사람들은 독일의 정치 반대파,공산주의자,사회민주주의자들 이었다. 그리고 이 수용소는 유럽의 모든 국민들이 수용된, 국제적인 수용소가 되었다. 하지만, 부헨발트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혹은 비르케나우 같은 절멸수용소는 아니었다. 즉 부헨발트에는 가스실이 없었다. 그곳에서 수감자들은 강제노동으로 죽어갔지, 갑작스럽게 제거되지는 않았다.

 

Londres : Orwell redécouvre la démocratie
Nous devons faire un dernier détour par Londres. George Orwell a combattu en Espagne au sein d'une brigade internationale liée à l'extrême gauche européenne - et aux antipodes du stalinisme -, représentée localement par le Parti ouvrier d'unification marxiste (POUM). Il relate son expérience dans un livre magnifique intitulé Hommage à la Catalogne. Au milieu des années 40, il commence la rédaction d'un autre ouvrage extraordinaire, Le Lion et la Licorne, qu'il termine en 1941, juste avant l'invasion de l'Union soviétique par les nazis.

 

런던 : 오웰이 민주주의를 재발견하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런던을 방문해야 한다. 조지 오웰은 유럽 극좌파와 관련 있는, 국제여단 소속으로 스페인에서 싸웠고, 스탈린주의를 반대했으며, 통합 마르크스주의 노동자당의 지역대표였다. 그는 자신의 스페인내전 참전 경험을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훌륭한 책으로 만들어냈다. 1940년대 중반, 그는 또 한 권의 훌륭한 책을 서술하게 되고, <사자와 일각수>였고, 그는 이 책을, 나치의 소련침공이 개시되기 직전에 완성하게 된다.

 

Orwell, internationaliste et marxiste d'extrême gauche, ennemi du stalinisme et subissant quotidiennement les incursions aériennes de la Luftwaffe, réagit alors de manière surprenante : il se propose de redécouvrir l'Angleterre. Le Lion et la Licorne est un ouvrage pionnier, une revendication d'un sentiment d'identité nationale de la part de quelqu'un qui s'est vu poussé au radicalisme extrémiste précisément en raison de son internationalisme. La rencontre d'Orwell avec l'Angleterre est une redécouverte de l'identité, mais aussi de la démocratie libérale, de la part de quelqu'un venant d'une position marxiste. Il faut dire en effet que la démocratie libérale n'était pas seulement dans la ligne de mire des fascistes et des nazis, mais aussi de l'extrême gauche.
Ainsi, pour le lecteur d'aujourd'hui, l'un des sujets essentiels de l'essai d'Orwell semble être la démocratie, comme condition préalable universelle des sociétés occidentales.

 

오웰은, 국제주의자 이고 극좌파 마르크스주의자였고, 스탈린의 적이었고, 독일공군의 공중 폭격을 매일 경험해야 했던 당시에, 이런 상황에 대해 놀랄만한 방법으로 대응하게 된 것이다 : 그가 잉글랜드를 재발견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사자와 일각수>는 실험적인 저작으로, 그는 민족정체성 이라는 감정을 가지자고 주장하고 있고, 이것이 놀랄 만 했던 것은 과거 국제주의자였고, 보다 정확하게는 극단적 급진주의자가 민족감정을 촉구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오웰과 잉글랜드와의 만남은 정체성의 재발견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사람이 자유민주주의를 재발견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에 자유 민주주의는 파시스트들과 나치의 공격목표였을 뿐만 아니라, 극좌파의 공격목표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오늘날의 독자에게, 오웰의 이 논평집의 본질적인 주제는 민주주의인 것으로 보이고, 이것은 서구 사회의 보편적이고 선결적인 조건인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C'est peut-être par là que j'aurais dû commencer. Mais c'est par là que je vais terminer, ou que je recommencerai. Parce qu'il est très clair aujourd'hui en Europe que l'unité européenne ne peut être fondée que sur la raison démocratique, sur les principes de la démocratie et la solidité de ses valeurs. Beaucoup d'intellectuels occidentaux aiment à mettre en doute ou à dénigrer le caractère universel de la démocratie. A la place, ils préfèrent défendre les valeurs locales de la vie communautaire, la chaleur et l'entraide qui existent dans ces communautés, et la communauté elle-même. Toutefois, dans l'Europe que nous sommes en train de construire, les principes de base d'Orwell, universalistes et démocratiques, peuvent s'appliquer de nombreuses manières aux valeurs locales. Et, partant de là, il est évident que l'unité de l'Europe ne peut se construire qu'à travers la diversité.

 

내가 논의를 시작해야 할 곳은 바로 이 대목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논의를 끝내야만 하기도 하고, 바로 여기서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유럽에서, 유럽의 통합이, 민주적 이성, 민주주의 원칙, 그 가치들의 공고함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 매우 명확하기 때문인 것이다. 물론 많은 서양 지식인들이 민주주의의 보편적 성격에 의문을 제기하고,비판하기를 좋아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 민주주의 대신에, 그들은 공동체적 삶의 지역적 가치들을 옹호하고, 이들 공동체에 존재하고 있는 열기 와 상부상조를 옹호한다. 아무튼 , 지금 우리가 만들어나가고 있는 유럽에서, 보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오웰적 가치는 지역적 가치들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이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로부터 출발해서, 유럽의 통합이 다양성에 기반해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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