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 회담을 바라보는 폴란드의 시각-"우리는 희생양 이었다" Encyclopedie



Les sacrifiés de Yalta

[폴란드]얄타 의 희생양들...

 

저자는 1970-1980년대 민주주의 야당 세력의 일원이었고, 그는 현재 바르샤바 가톨릭 대학의 사학과 교수이며, 독립 언론인이다. 중동부 유럽의 특수성은 그가 선호하는 주제 중의 하나이다.

 

Membre de l’opposition démocratique dans les années 1970 et 1980, il est aujourd’hui professeur d’histoire à l’Université catholique de Varsovie et journaliste indépendant. La spécificité de l’Europe centrale et de l’Est est l’un de ses sujets de prédilection.

17.02.2005|Bohdan Cywinski|Rzeczpospolita

Il y a dans l’Histoire des mots clés sans lesquels il est impossible de comprendre la réalité d’aujourd’hui, de savoir pourquoi les choses sont comme elles sont et pas autrement. Parmi les plus connus et les plus fondamentaux figure Yalta.

 

역사에는 핵심 단어들 같은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이 단어들을 모른다면, 오늘의 현실을 이해할 수도 없고, 왜 오늘날의 사태가 이런 식으로 전개가 되었는지 알 수도 없으며, 왜 다른 식으로 진행되지 않았는지 알 수도 없다. 이런 핵심 단어 중에 가장 알려진 것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얄타».

 

Ce mot sonnait à mes oreilles depuis mon enfance. Il signifiait : voici notre destinée, le monde est ainsi fait, il y a des limites objectives à nos aspirations. Puis, au fur et à mesure que je grandissais, la signification morale de Yalta s’est encore plus aiguisée : voilà à quoi ressemble notre victoire volée, voilà comment on nous a vendus et réduits en esclavage. Puis l’étonnement de la jeunesse a cédé au réalisme amer, à la méfiance envers tous les “alliés” et au sentiment de solitude de l’homme confronté à l’Histoire. Un chanteur, qui m’était cher à l’époque, disait : “Personne ne choisira mes amis, les ennemis, je les choisirai moi-même.” Le temps a passé, et je peux dire maintenant que ceux qui ont connu cette solitude glacée sont plus mûrs pour être solidaires. Ce n’est peut-être pas un hasard si le syndicat Solidarnosc a vu le jour en Pologne, justement…

 

나는 이 단어를 어린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었다. 그것이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했다 : 이것이 바로 우리의 운명이라고, 세계는 그렇게 행동했고, 우리의 열망과는 무관하게, 객관적 한계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얄타 였다. 그리고 나서, 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얄타가 가지는 도덕적 의미는 보다 자극적인 것이 되어갔다 : 얄타는 우리가 어떻게 승리를 도둑  맞았는 지와 동의어가 되었고, 어떻게 우리 폴란드가 팔렸고, 우리가 어떻게 노예상태로 전락하게 되었는지를 의미하는 단어가 되었다. 이렇게 청춘의 경악이 쓰린 현실주의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고, 모든 당시 동맹국들에게 대해 환멸을 가지게 되었고, 역사에 직면한 한 인간의 고독감을 맛보게 되었다. 내가 그 시절에 좋아했던 한 가수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었다 : «누구도 내 친구들과 내 적들을 선택할 수는 없을 것이고, 그것들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이제 세월이 흘러, 이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런 차가운 고독감을 맛본 사람들은 보다 성숙하게 되었고, 이것이 보다 연대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귀결되지 않았을까라는 진단 말이다. , 정확히 말하자면, 폴란드에서 연대 노조 운동이 출현한 것이 단지 우연의 산물만은 아닐 것이다.

 

La conférence de Yalta s’est tenue il y a exactement soixante ans. La Seconde Guerre mondiale était presque finie, l’Allemagne agonisait. Les Russes étaient maîtres de presque toute l’Europe centrale et orientale. Les Américains et les Britanniques avaient libéré la France et la Belgique, mais sans atteindre le Rhin. La disproportion de l’avancée des troupes à l’Est et à l’Ouest était alors flagrante. L’URSS était à son apogée triomphale, tandis que les Occidentaux, malgré les succès locaux, n’étaient pas toujours très efficaces. C’est Staline qui a choisi la date de la conférence. Le lieu – une station balnéaire de Crimée – soulignait encore plus la position dominante de Staline, qui forçait la main des Occidentaux, obligés de venir chez lui.

 

정확히 60년 전에, 얄타 회담이 있었다. [역자주 이 글은 지난 2005년에 작성된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거의 막바지에 다 달았고, 독일은 몰락 그 직전에 있었다. 러시아는 거의 모든 중,동부 유럽의 주인이었다. 미국과 영국이 프랑스 와 벨기에를 해방시키기는 했지만, 아직 라인강 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동쪽과 서쪽에서의 연합군 진격의 불균형은 명백한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승리의 정점에 있었고, 서구는, 그들의 지엽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항상 매우 효율적이지는 못했다. 얄타 회담의 날짜를 결정한 사람은 바로 스탈린이다. 또한 크림반도의 온천 휴양지인 이 장소도, 스탈린의 주도적인 지위를 다시금 강조하는 것으로, 스탈린인 서구지도자들이 자신의 나라로 오도록 강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Pour certains, la conférence fut un échec des Occidentaux. On analyse les négociations, on s’interroge sur les erreurs commises par Churchill et Roosevelt, sur leur marge de manœuvre face à Staline, vainqueur incontesté sur tous les fronts, libre d’agir à sa guise dans les pays tombés sous sa domination.

 

확실히, 이 회담은 서구에게는 실패였다. 우리는 협상들에 대해서 분석할 수 있고, 처칠과 루즈벨트가 범한 실수들을 지적할 수 있고, 스탈린에 맞선 그들의 무기력을 지적할 수 있고, 당시 스탈린은 모든 방면의 전선에서, 부인할 수 없는 승리자였고, 이렇게 자신의 지배 로 전락한 나라들을 자신의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행동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Pour d’autres, Yalta est le symbole de la stratégie politique anglo-américaine adoptée au lendemain de l’attaque de l’Union soviétique par l’Allemagne nazie, le 21 juin 1941. Elle consistait à agir en étroite collaboration avec l’Etat soviétique. On s’interroge sur le bien-fondé d’un tel choix, sur la fidélité – toute subjective – des Occidentaux aux principes idéologiques exprimés dans la Charte atlantique, sur leur capacité de réaction à la politique mensongère et antidémocratique d’un Staline qui ne tentait même plus de cacher son projet de conquête de la moitié du continent.

 

다른 관점에서, 얄타는 1941 6 21, 나치 독일의 소련 연방 공격 이후에 채택된 영국과 미국의 정치 전략의 상징이다. 이 전략이란, 소련과 긴밀한 협력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국과 미국의 이 같은 선택이 그들이 대서양 헌장 [제2 세계대전 1941 8 14일 영국의 처칠 총리와 당시 비교전국이었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북대서양에서 5일간의 선상회의 끝에 발표한 공동선언] 에서 표명한 이데올로기적 원칙들에 충실한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성이 있으며, 스탈린의 거짓이며, 반민주적인 정책에 직면한 영국과 미국의 대응 능력에 대해 질문을 제기해야 하고, 당시 스탈린은 유럽 대륙의 절반을 정복한다는 그의 야심을 더 이상 감추려 노력하지도 않았다.

 

La conférence de Yalta ne pouvait profiter qu’à Staline. L’Occident ne pouvait espérer que conserver une petite influence sur l’avenir politique des pays à l’est de l’Elbe. Mais, pour ce faire, il aurait fallu agir avec plus de fermeté. L’Occident a accepté la domination de Staline, faisant semblant de croire à ses promesses d’élections libres dans les pays occupés par les Soviétiques. Or les Occidentaux ne pouvaient plus avoir d’illusions sur ce point.

 

얄타 회담은 스탈린에게만 이득이 되었다. 서양은 엘베강 동쪽의 국가들의 정치적 장래에 대해서, 약간의 영향력만을 행사할 수 있기만을 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위해서도, 서구는 보다 더 완고함을 가지고 행동했어야 옳았다. 서구는 스탈린의 지배를 용인했던 것이며, 소련이 점령한 국가들에서의 자유 선거에 관한 스탈린의 약속들을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구가 이러 문제에 대해 환상을 가져서는 안됐던 것이다.


Pendant quarante ans, l’ordre de Yalta a profité à l’Occident. Après une courte peur pour la frontière établie sur l’Elbe, on a découvert que cette petite menace n’était pas un obstacle au développement économique et qu’elle accélérait d’une manière certaine l’intégration de l’Europe de l’Ouest. Combien de fois, dans les années 1980, ai-je entendu dire à propos de Solidarnosc : “Votre radicalisme insensé va détruire l’équilibre de Yalta !” Effectivement, nous l’avons détruit. La zone de domination de Moscou n’est plus. L’Europe a changé de visage. Pour toujours ?…


40
년 동안, 얄타의 질서가 서구사회에 이득이 되었다. 매우 잠깐 동안, 엘베강에서 확정된 국경에 대한 불안이 존재하기도 했지만, 서구는 곧 이런 작은 위협이 경제발전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고, 어느 정도는 이 국경이 서유럽의 통합을 가속화 시켜준 것도 사실이다. 지난 1980년대에, 연대노조 운동에 대해, 나는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지적하는 것을 질리도록 들었다: «당신들의 지나친 급진주의가 얄타의 균형을 파괴할 것이다결국, 우리가 그것을 파괴했다. 모스크바가 지배하는 지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유럽은 이제 그 모양새를 바꿨다. 그런데, 항상 그럴 것인가 ? ....




덧글

  • 행인1 2009/09/29 23:18 # 답글

    하지만 1938년 체코분할점령때 폴란드가 어땠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뭐랄까...
  • deokbusin 2009/09/30 16:29 # 삭제 답글

    전간기 폴란드가 차지한 커즌 선 동부의 폴란드 영토에 살던 사람들은 폴란드계-로마카톨릭교도가 아니라 러시아계에 동방정교도들이었지요. 오히려 폴란드는 동부의 영토를 잃은 부분만큼 독일영토를 뜯어냈으니 그리 손해본 것도 아닙니다.

    진짜 당한 쪽에서 보면 폴란드의 주장은 완전 어거지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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