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베르토 에코]식물성 그리고 광물성 기억 : 책의 미래 - 2편 Le monde

다음은 움베르토 에코가 2003년 11월 1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개관을 기념해서 한 강연 영어원문을

번역한 것이다. 원문이 긴 관계로 여러 글로 나누어 올릴 예정이다.
원문 주소 -

Let us start with an Egyptian story, even though one told by a Greek. According to Plato in Phaedrus when Hermes, or Theut, the alleged inventor of writing, presented his invention to the Pharaoh Thamus, the Pharaoh praised such an unheard of technique supposed to allow human beings to remember what they would otherwise forget. But Thamus was not completely happy. "My skillful Theut," he said, "memory is a great gift that ought to be kept alive by continuous training. With your invention people will no longer be obliged to train their memory. They will remember things not because of an internal effort, but by mere virtue of an external device."

이집트 이야기로부터 시작해 보죠, 비록 그리스인들이 기록한 것이기는 하더라도 말이죠. <파이드로스>에서 플라톤에 따르면, 발명의 신으로 간주되는 헤르메스(그리스 신화) 혹은 토트(이집트 신화)가 파라오 타무스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소개했을 때, 이 파라오가 이 전대미문의 기술[문자]로 인해 인류가 과거같으면 잊었을 것을 기억하게 되었다고 칭찬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타무스는 완전히 행복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나의 재능 있는 토트여",그가 말하길, "기억은 끊임없는 훈련으로 생기를 불어 넣어야만 하는 위대한 선물일세. [하지만] 자네의 발명 때문에,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들의 기억을 훈련시키려 하지 않을 걸세. 그들은 사물을 내면적 노력을 통해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외부 장치[문자]에 의지 해서만 기억하려고 들 걸세."

We can understand the preoccupation of Thamus. Writing, like any other new technological invention, would have made torpid the human power which it pretended to substitute and reinforce. Writing was dangerous because it decreased the powers of mind by offering human beings a petrified soul, a caricature of mind, a mineral memory.

우리는 타무스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쓰기란, 다른 새로운 기술 발명처럼, 인간의 능력을 둔감하게 만들 것이란 것입니다. 마치 쓰기가 그것을 대체하고 보완할 것처럼 말이죠. 쓰기는 그것이 인류에게 무감각한 영혼, 정신의 묘사, 광물성 기억을 제공함으로써 정신의 힘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위험했던 것입니다.

Plato's text is ironical, naturally. Plato was writing down his argument against writing. But he was also pretending that his discourse was told by Socrates, who did not write (since he did not publish, he perished in the course of the academic fight.) Nowadays, nobody shares Thamus's preoccupations for two very simple reasons. First of all, we know that books are not ways of making somebody else think in our place; on the contrary, they are machines that provoke further thoughts. Only after the invention of writing was it possible to write such a masterpiece of spontaneous memory as Proust's A la Recherche du Temps Perdu. Secondly, if once upon a time people needed to train their memories in order to remember things, after the invention of writing they had also to train their memories in order to remember books. Books challenge and improve memory; they do not narcotise it. However, the Pharaoh was instantiating an eternal fear: the fear that a new technological achievement could kill something that we consider precious and fruitful.

플라톤의 텍스트는 물론 역설적입니다. 플라톤은 '쓰기'에 반대해서 그의 주장을 써 내려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의 이야기가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말해진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가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학문적 논쟁와중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날 누구도 매우 명확한 두가지 이유 때문에 타무스의 고민에 공감하지 않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책들이 다른 누군가의 생각을 우리에게 주입시키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이와는 반대로, 책들은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장치들입니다.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대작이 쓰여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쓰기의 발명 덕택입니다. 둘째로, 만약 옛날 옛적에 사람들이 어떤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들의 기억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었다면, 쓰기의 발명 이후에는, 그들은 또한 책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들의 기억을 훈련시킬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책들은 기억에 도전하고, 기억을 개선시킵니다 : 책들은 기억을 무디게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영원한 공포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 그것은 바로 새로운 기술적 업적이 우리가 가치있고 소중한 것으로 간주하는 어떤 것을 죽일지 모른다는 공포 말입니다.

I used the verb to kill on purpose because more or less 14 centuries later Victor Hugo, in his Notre Dame de Paris, narrated the story of a priest, Claude Frollo, looking in sadness at the towers of his cathedral. The story of Notre Dame de Paris takes places in the XVth century after the invention of printing. Before that, manuscripts were reserved to a restricted elite of literate persons, and the only thing to teach the masses about the stories of the Bible, the life of Christ and of the Saints, the moral principles, even the deeds of national history or the most elementary notions of geography and natural sciences (the nature of unknown peoples and the virtues of herbs or stones), was provided by the images of a cathedral. A mediaeval cathedral was a sort of permanent and unchangeable TV programme that was supposed to tell people everything indispensable for their everyday life, as well as for their eternal salvation.

나는 의도적으로 '죽이다' kill 라는 동사를 사용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략 14세기가 지난 뒤 빅토르 위고가 그의 파리의 노트르 담에서 클로드 프롤로라는 한 사제의 이야기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슬픔에 잠겨 그의 성당의 첨탑을 응시합니다. 파리의 노트르 담 이야기는 인쇄술이 발명된 후인 15세기에 일어난 일을 다룹니다. 인쇄술 발명 이전에, 필사본들은 문자해독 능력이 있는 엘리트 집단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리고 평민들에게 성경 이야기, 예수와 성자들의 삶, 도덕 원칙, 심지어 민족사의 영광 이나 지리와 자연과학의 기초 개념들을 가르쳐주는 유일한 것은 바로 성당이 제공하는 이미지들이었습니다. 중세의 성당은 일종의 영원하고, 바뀌지 않는 티비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평민들에게 영원한 구원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일상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해주기 위해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Now, however, Frollo has on his table a printed book, and he whispers "ceci tuera cela": this will kill that, or, in other words, the book will kill the cathedral, the alphabet will kill images. The book will distract people from their most important values, encouraging unnecessary information, free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s, insane curiosity.

하지만 오늘날 이라면, 프롤로는 그의 탁자 위에 인쇄된 책을 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읖조리겠죠. "이것이 그것을 죽일거야. ceci tuera cela "[원문장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불어 표현 ceci tuera cela 을 그대로 사용함] : 이것이 그것을 죽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책이 성당을 죽일 것이고, 알파벳이 이미지들을 죽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책은 불필요한 정보, 성상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 사악한 호기심을 장려함으로써, 가장 중요한 가치들로부터 사람들을 멀어지게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1편은 여기로 -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