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 Teun Voeten
장소 - 시에라리온의 프리타운 Freetown, Sierra Leone
소녀의 이름은 Menuna Mansaray다. 왼손에 식빵을 들고, 흰옷을 입은 그녀는 귀엽다.
하지만, 이 소녀의 오른손은 시에라리온 혁명 반군에 의해 잘려나갔다.
다음은 보도사진학자 수지 린필드 Susie Linfield 의 분석이다.
이 사진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사진이 증거하는 행동이 불쾌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소녀는 지금 우리가 그녀의 사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사진 촬영 순간이나 지금 이순간이나 알기나 할까?
차라리, 그녀의 육체적 상처와 상처입은 인간성이 제1세계 독자들에게 충격을 주고, 부끄러움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데 충분할지 고민하는 듯 하다.
그렇다면, 이 사진을 보는 독자들이 확실한 충격을 받기위해서는, 이 소녀의 상처가 더 볼쌍사나워야만 할까?
이렇게, 제3세계 소녀의 상처가 깊을 수록, 우리가 그녀가 당한 일에 관심을 가질 개연성이 높다는 이러한 포토저널리즘의 생산,유통,소비는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보도 사진을 통해, 오늘날의 세계속에서, 제1세계와 제3세계는 "연민"이라는 틀로 묶이게 된다. 제1세계란 세계화의 흐름에 승리한 쪽이고, 제3세계란 이 소녀가 살고 있는 미친 세계다.
나의 논평 -
연민이란 관점에서, 제1세계는 연민의 주체가 되고, 제3세계는 그 대상이 된다. 그리고 보도사진가들은 제1세계 독자들을 위해, 끊임없고 정처없이 연민거리들을 찾아 나선다. 이미지가 충격적일 수록 독자들의 관심을 끌 확률이 높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비참한, 말도 안되는 세계를 찾아 방황하고 있다. 가령 오늘 오른팔이 잘린 소녀의 사진이 관심을 끌었다면, 내일은 양팔이 모두 잘린 소녀의 사진을 찾아야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어느순간, 제1세계 독자들은 제3세계 타인의 고통 그리고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단계로 접어 들었다고 생각한다.마치, 사회적 재앙을 그리는 장르영화 애호가들이 그 영화를 소비하는 것 처럼 말이다. 그리고 사진가들은 감독이 되어, 보다 고통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을 아닐까? 뭔가에 연민을 느끼고, 내가 인간적인 연민의 감정을 느끼는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 제1세계 독자들은 끊임없이 제3세계의 고통을 소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런지...
이런 연민이란 틀로 짜인 세계의 비참의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덧글
수단다르푸르에서 수십만이 아랍인에 의해 죽고 국경지대에서 백만단위로 죽어나가도, 아프리카 각지의 내전과 분쟁으로 아무리 많이 죽어도,
과연 가자지구의 1000명만큼 이슈가 될까요? 세계 각국이 지원과 도움의 손길, 그리고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까요?
반유대주의를 건드리고, 아이의 시체를 수십명의 어른이 여기놨다 저기놨다 연출하고 서라도 사람들을 자극해야만 이슈가 되고 도움을 얻을 수 있는거죠.
가슴아픈 일이지만, 그게 현실인걸요.
뉴스에 나오는 가자지구의 아이들의 사망장면에는 사람들이 분노하지만, 사진도 없는 수단 다르푸르에서 학살된 수만명을 넘을 아이들과 인종개선이란 미명하에 강간된 어린 여자아이들은 일단 눈에 안보이잖습니까..
물론 그 상업주의는 더러워 보일런지도 모르지만, 과연 우리가 그럴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는 미제국주의 운운하며 이슬람을 폭도처럼 묘사하는 "블랙호크다운"을 비웃지만, 소말리아에서 군벌들에 의해 죽어가고 제발 미군을 보내달라고 애원하던 사람들이 기억못할 BBC의 다큐멘터리를 기억하지는 않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