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불관계,2005] 佛-獨 화해의 상징 ‘알자스 지방’ Le monde

[세계의 눈] 佛-獨 화해의 상징 ‘알자스 지방’

[동아일보] 2005-06-03 31면 총40면 오피니언·인물 1646자

필자의 고향인 알자스 지방은 독일과의 국경 지역에 자리 잡은 곳이다. 그런 탓에 이곳은 오랫동안 두 나라의 충돌로 적지 않은 희생을 치렀다. 알자스는 원래 독일 문화권이었다. 그러다 1648년 루이 14세 시절 프랑스에 병합됐다가 1870년에는 다시 독일로 귀속됐다. 1918년 또다시 프랑스 땅이 됐으며 1940년에는 히틀러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그 뒤 1944년 해방을 맞았다.

잇따른 병합과 해방의 역사를 통해 알자스는 독일화와 프랑스화를 반복해 겪었다.

필자의 아버지는 이 지역에 살면서 3번이나 국적을 바꿔야 했다. 아버지는 1908년 독일에서 태어나 열 살 때까지는 독일인으로 자랐다. 학교 수업은 독일어로 진행됐고 프랑스어 사용은 엄격히 금지됐다. 1918년부터 프랑스어가 다시 국어가 됐다. 그러다 1940년 독일 국적을 강요당했으며 1944년 다시 프랑스인이 됐다.

아버지는 거주 지역을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 국경이 바뀌었을 뿐이다. 알퐁스 도데의 유명한 소설 ‘마지막 수업’은 아버지 세대의 경험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파란만장하고 고통스러운 역사였지만 알자스는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 두 나라 문화를 모두 축적할 수 있게 됐고 주민들은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알자스의 주도인 스트라스부르에는 양국의 특징이 깃든 괜찮은 유산이 많이 남아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를 상징하는 스트라스부르에 유럽연합(EU) 의회가 설치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주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2000년 전에 이미 라틴 민족과 노르딕 민족이 이곳에서 공생했던 적이 있기 때문에 이곳은 유럽이 한데 어울리는 상징성을 띤 도시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 유럽의 통합으로 국경이 열린 덕분에 알자스는 국제적인 지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매일 아침이면 6만여 명이 알자스를 떠나 독일과 스위스의 직장으로 출근한다. 수많은 스위스인과 독일인이 알자스에 집을 구해 살고 있다. 독일 스위스 미국 일본의 기업들도 이곳에 공장을 지었고, 동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알자스가 걸어 온 발자취를 볼 때 프랑스와 독일의 화해, 알자스의 성공적인 전환에는 세 가지 배경이 있었다고 판단된다. 우선은 고위 정치인들의 의지다. 양국의 정상인 샤를 드골과 콘라트 아데나워, 지스카르 데스탱과 헬무트 슈미트, 프랑수아 미테랑과 헬무트 콜은 시대별로 짝을 이뤄 우호를 다지면서 대중에게 모범을 보였다.

두 번째로는 구원(舊怨)을 해소하고 새로운 역사를 쓰기 위해 공통된 목표를 찾는 일이다. 마지막으로는 양국의 문화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알자스 사람들의 노력이다.

알자스의 모델이 다른 지역으로도 수출될 수 있을지 생각해 본다. 특히 한국 중국과 일본이 갈등을 빚고 있는 아시아 지역을 떠올려 본다.

역사와 상황은 다르다. 일본은 독일처럼 과거사에 대한 비판적 검증을 하지 않았다. 일본의 고위 공직자들은 매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다. 그리고 한국과 중국은 매번 이에 반발한다.

프랑스인들은 이제 제2차 세계대전을 독일 국민과의 전쟁이 아닌 나치와의 전쟁으로 여긴다. 독일의 지도자들이 그렇게 여겨지도록 노력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프랑스 지도자들의 노력도 컸다. 일본뿐 아니라 한국 중국의 지도자들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제라르 뱅데 에뒤 프랑스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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