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나의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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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과 독일에 대한 일본여론의 변화?"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독소전쟁 발발 이전, 마쓰오카 요스케가 일본 외무장관에 있을 동안, 일본은 삼국동맹의 의무를 적극적으로 지킬 것을 약속했다. 

가령, 41년 5월 마쓰오카는 도쿄의 미국대사 그루에게, 다음을 통보했다. 즉 대서양에서 일본 외무장관은 미국의 호송 때문에 미국과 독일의 전쟁이 발발한다면, 조약이 확실히 적용될 것이란 경고였다. 마쓰오카에 따르면,만약 대서양에서의 해상 행동에서 전쟁이 발발한다면, 미국이 공격자로 규정될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일본 외무장관은 이 경우, 삼국동맹 조약 제3조에 따라, 일본도 전쟁에 가담하게 될 것이라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미국이 제대로 된 합리적인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중립이라는 가면 뒤에서 전쟁행동에 돌입하는 것 대신에 독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전포고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Grew's report on this talk is in Foreign Relations: Japan, II, 145-48. ; Herbert Feis, The Road to Pearl Harbor (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0) , p.202에서 재인용.]

하지만, 삼국동맹의 의무에 대한 일본의 적극성은 6월의 독소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쇠락하고, 일본정책의 독립성이 강화되었다. 독소전쟁 직후에 마쓰오카가 경질되면서, 일본은 삼국동맹과 독일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일본정부의 검열 하의 일본언론의 보도도 마찬가지의 변화를 겪었다. 독소전쟁 이후 ,일본 언론은 삼국동맹이 일본외교의 초석이라고 더 이상 주장하지 않게 되었다. 마쓰오카의 경질에도 불구하고, 개각을 단행한 고노에 내각은 삼국동맹 조약을 파기하지는 않았지만, 일본 외교정책의 독립성을 강화시켰다. 고노에는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의 힘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주목할 것은 대서양에서의 미국과 독일의 선전포고되지 않은 전쟁에 대한 일본 언론의 상대적 침묵이었다. 대서양에서의 미국의 해군 활동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삼국동맹도 거의 기사로 다루어 지지 않았고, 미국의 유럽 전쟁 개입 문제도 일본언론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8월의 루스벨트와 처칠의 대서양 헌장 선포 관련 보도도, 이는 나치 독일에 대항한 선언이며, 일본과는 무관하다고 일본언론은 보도했다. 

9월 4일의 대서양에서 독일 유보트가 미국 구축함 그리어 호를 공격한 사건에 대해서, 일본언론은 미국과 독일 사이의 사건일 뿐이라 해석했다. 

독일 선전당국의 선전공세에도 불구하고, 독소전쟁에 대한 일본언론의 보도는 독일의 승리에 대해 점점 의혹을 제기했다. 미야코 지는 나치가 최종 승리를 거두는데 매우 어려움에 빠질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의 뉴스위크는 전황이 주축국에 불리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독소전쟁에 대해서, 일본언론은 엄격한 중립적 태도를 유지했다. 심지어 토야마 미수루는 아시아의 모든 서양 이방인을 반대한다고 주장했고, 마야코는 미국과 독일은 모두 세계에서의 군사적 패권을 추구한다고 비난했다. 
 

참고-

Paul W. Schroeder, The Axis Alliance and Japanese-American Relations, 1941. Cornell University Press. 1958. 158-160.

41년 내내 일본과 독일의 삼국동맹은 작동불능의 상태에 있었는데,

같은 해의 미일 협상에서 미국의 코델 헐 국무장관은 일본에게 왜 삼국동맹의 파기를 강하게 주장했는지 

이해가 힘든 대목이다. ㅠㅠ



[41년]히틀러,"역시 일본놈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독소전쟁과 삼국동맹 그리고 일본?

1941년 6월의 독소전쟁의 발발은 불과 얼마전에 소련-일본 중립조약을 체결한 일본에게 충격을 주었다. 심지어 독일은 삼국동맹의 정신에 따라 , 일본이 소련의 배후인 시베리아를 공격해 주기를 원했다. 이에 대해서 일소 중립조약을 성사시킨 장본인 외무장관 마쓰오카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왕따를 자처했다. 

일본정부가 워싱턴과 베를린의 일본 대사관에 보낸 정부방침에 따르면, 일본은 당분간 북방 작전, 즉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소일 중립조약을 지킬 것이었다. 당분간이라는 표현을 동원하면서, 독소전쟁이 독일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경우, 일본이 러시아 패배의 전리품을 챙길 기회를 외면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7월에 마쓰오카 후임으로 외무장관이 된 도요다 데이지로 Admiral Teijiro Toyoda 는 일본의 조치는 삼국동맹의 정신과 목표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0월에 고노에 내각이 사퇴하고 등장한 도조 히데키 내각도 같은 입장이었다. 도고 시게노리 외무장관은 심지어 일본이 독소전쟁을 중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히틀러를 화나게 만들었다.

히틀러는 일본에 대해 이렇게 판단했을 것이다. "역시 일본놈들은 믿을 것이 못된다 !"  


참고-

Paul W. Schroeder, The Axis Alliance and Japanese-American Relations, 1941. Cornell University Press. 1958. 139-140.


40년 서유럽 공격을 앞둔 히틀러에게 일본 정부가 요구한 것은

서유럽을 공격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ㅠㅠ

히틀러의 심정을 추측해 보자면,

"내가 이러려고 일본과 친하게 지내게 된건지, 자괴감이 듭니다." ㅠㅠ

[41년]장개석, "내가 미국을 일본과 전쟁하게 만들었다!"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미국을 유도해서 일본과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던 입장을 취하도록 한 것은 누구였는가?
장제스는 실제로 자신이 미국의 태도를 강경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미했다고 하더라도, 장제스는 41년의 미일협상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물론 영국의 처칠이 장개석 보다는 더 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41년에 처칠과 더불어 중국의 장개석은 미일협상의 결렬을 원했다. 만약 미일 협상의 성사가 미국이 중국에서의 일본의 기득권을 인정한 것에 기초했다면, 그것은 장개석에게 외교적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이는 미국-영국-중국-소련의 연합국 진영의 균열을 초래했을 것이다.

장개석은 41년  11월의 일기에서 다음을 주장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제안은 전적으로 나의 요구에 기초한 것이다. 과거의 타협적 분위기와 비교할 때 근본적인 태도 변화가 일어났다. 어젯밤 나의 가족과 측근들이 걱정과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나는 그들에게 외교에서 매우 특별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누가 오늘의 나쁜 소식이 내일의 좋은 소식이 되지 않으리라고 확언할 수 있겠는가? 지금 그 말이 실현되었다. 이것은 진실과 이성이 승리를 거둔 [경우다.] (1941년 11월 27일). 

[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푸른역사,2009. 241-242.]

진주만 사건 이전부터, 미국은 일본과의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에 장개석을 흥분시킨 것은 11월 9일 미국 육군부와 해군부에서 그에게, 적어도 12월 10일까지는 극동에서 미국의 군사행동을 위한 준비가 완료될 것이란 통보를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8년 동안 장개석은 미국과 영국의 상대적 외면 속에서 일본과 고독한 전쟁을 진행 중이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이제 장개석의 고독의 세월이 끝났음을 요란하게 알리는 사건이었다.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이 일본에 적용되지 않은 이유?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일부 일본 역사가들이 30년대의 영국이 아시아에서 일본의 우세를 인정하고, 유럽에서와 유사한 유화정책을 일본에 대해서 실천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관련 증거는 이 주장을 설득력없게 만든다. 비록 영국 총리실의 일부 관리들이 일본에 대한 유화정책을 지지했다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강력한 반대의 힘이 존재했다.

영국의 사고를 지배한 논리 중 하나는 일본에 대한 영국의 화해 정책이 미국을 소외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영국이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일을 망칠 수도 있었다. 

둘째, 영국이 일본을 동정하면, 후자가 소련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존재했고, 이 경우 유럽에서 독일을 견제하는 소련의 능력이 손상될 것이었다. 

셋째, 영국 정보 당국은 유럽에 전쟁이 발발하지 않는 이상, 일본이 군사적으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은 후진적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동북 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두고 소련의 견제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일본에 대한 유화가 중국을 화나게 만들 수도 있었고, 중국에서의 영국의 경제적 이익에 해가 될 수도 있다고 간주되었다. 

비록 영국은 일본에 대한 유화의 유혹에 시달렸지만, 결국 영국이 선택한 대일 정책은 유화도 일본에 대한 공개적 적대 정책도 아닌 것이 되었다. 따라서 영국은 일본의 예상대로 행동하지 않았고, 일본의 고립감을 심화시켰다.


출처-

Antony Best , Imperial Japan, in Robert Boyce,‎ Joseph A. Maiolo (eds.), The Origins of World War Two: The Debate Continues,  Palgrave; 2003,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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