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안녕하세요!
파리13구 블로그 방문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프랑스 와 한국 사이에서, 올바른 사회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블로그 입니다.

혁신을 추구하는, 20,30대 독자들을 대상으로,
사회비교, 역사비교를 통해, 올바른 사회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공유할 수 있는 블로그가 되기를 원합니다.

개인적인 문의는 비공개 덧글을 통해
방명록에 덧글로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 운영자 파리13구...
by 파리13구 | 2018/12/31 13:12 | 나의 즐거운 일기 | 트랙백 | 덧글(120)
72년 8월에 헨리 키신저가 읽은 책은?
키신저의 경고...

1972년 8월, 키신저의 데탕트가 성공의 정점에 있었다.

같은 해 상반기 동안, 닉슨은 베이징과 모스크바를 잇달아 방문했고, 냉전의 3각외교를 완성했다.

8월 파리에서 열린 키신저와 레득토의 파리 평화협상 상황도 고무적이었다. 하노이가 남베트남의 티우 체제에 대한 완화된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휴전 조건으로 티우 대통령 타도를 주장하지 않게 되었다.

8월
하노이 정치국, 협상을 통한 타결을 승인했다.
 - 파리의 북베트남 협상단이 협상 조건인 티우 정권 타도 주장을 철회했다.  

8월 1월, 8월 14일
키신저, 레득토와 파리에서 회담.
 -티우 체제에 대한 북베트남의 입장 변화가 관찰되었다. 하노이의 기존 입장은 휴전 이전에 티우가 사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돌연,그들은 남베트남에 두 개의 정부, 두 개의 군대, 그리고 3개의 정치세력이 존재한다는 현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Marvin Kalb and Bernard Kalb , Kissinger , Dell Publishing (1975),p.339.


이런 상황에서, 키신저가 읽은 책이 다름 아니라, 메테르니히의 새 전기였다고 한다.

관련 내용을 워싱턴 포스트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현대의 메테르니히가 이 책 아니면 다른 어떤 책을 읽을까?" 


Marvin Kalb and Bernard Kalb , Kissinger , Dell Publishing (1975), 341.


by 파리13구 | 2017/10/19 11:23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마이클 왈저와 헨리 키신저...
마이클 왈저는 미국의 정치 철학자로, 매킨타이어와 마이클 샌델과 더불어 공동체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왈저는 56년 브렌다이스 대학에서 역사학 학사를 취득하고, 영국 캐임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이후, 하버드 대학 행정학과에서 61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하버드 행정학과 박사라는 점에서, 헨리 키신저와 과동문이다. 키신저는 54년에 메테르니히와 캐슬레이를 주제로 한 외교사 논문으로 행정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왈저와 키신저는 과동문이란 점 이외에도 유대계 미국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하지만,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두고, 키신저와 왈저는 입장 차이를 보였다.

특히, 70년 5월 1일, 닉슨 정부가 미군의 캄보디아 침공을 벌이자,

마이클 왈저는 행정학과 교수 신분으로 하버드 대학 교수 항의방문단 소속으로 백악관을 방문했다. 5월 8일 토마스 셸링이 이끄는 교수방문단이 백악관을 방문했다. 

옛 동료들에게 키신저는 닉슨이 철수라는 원래 목표를 잊은 것이 아니라고 안심시키려 했다. .
 
키신저에게 옛 동료들의 항의 방문은 모욕이었다. 그들은 정부 정책이 바뀌지 않거나 혹은 키신저가 사임하지 않으면, 하버드로 복귀해서 다시 강의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경고를 전달하기 위해서 방문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by 파리13구 | 2017/10/18 14:13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71년 수단 공산 쿠데타와 소련의 근심?
냉전 동안 소련은 세계 혁명에 혈안이던 혁명 국가였는가? 

<사진- 1971년 수단 공산주의 쿠데타 
공산 반군이 사회주의 집권 세력에 대해 벌인 쿠데타였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는 국제국이 존재했다. the International Department of the Central Committee

국제국의 기능은 세계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통제하는 것이었다. 1943년 코민테른 해체 이후, 소련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만든 것이 국제국이었다. 국제국 국장은 1957년-1986년까지 보리스 포노마레프 Boris Ponomarev 였다. 특히, 중소 분쟁이 고조되면서, 소련 공산당 국제국은 바르샤바 조약 기구와 제3세계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했다.

포노마레프에게 중소 분열의 교훈이란,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라도, 중국 처럼 소련 최대의 적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1971년의 수단 쿠데타는 포노마레프에게 이 교훈을 적용시킬 기회가 된 모양이다. 71년 수단의 공산주의 반군이 사회주의 대통령 정부에 반기를 들어 쿠데타를 벌였다. 공산 쿠데타는 71년 7월 19일에 발생했지만, 국내적 혹은 국제적 지원을 받는데 실패했다. 가파르 니메이리 대통령 측 군부가 역쿠데타를 벌여서, 니메이리가 대통령직에 복귀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국제국 국장 포노마레프는 71년 수단 공산 쿠데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쿠데타가 있던 밤, 그는 사무실로 출근했다. "나는 사무실에 앉아, 공포스러운 생각을 했다. 만약 반군이 승리하면 어떻게 될까? 그들은 그곳에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떠안게 될 것이며, 우리는 그들 모두를 먹여 살려야 할 것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악몽이었다. 우리에게 행운이게도, 그들이 졌다."

1980년 프랑스 대선에 대해서도 포노마레프는 같은 입장이었다. 국제국 내부에 프랑수아 미테랑을 지지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포노마레프 국장은 해외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승리가 소련에게 부채가 될 수도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가지고 있었다. 

WOLFF, DAVID. "INTERKIT: SOVIET SINOLOGY AND THE SINO-SOVIET RIFT." Russian History 30, no. 4 (2003),p.444
by 파리13구 | 2017/10/17 11:04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46년, 장개석 군대의 분탕질에 맞서는 호치민?
30년대 프랑스 유학 베트남인의 좌절?

<호치민과 생트니-1946년>

일본 패망 이후의 동아시아 질서 회복과 관련한 포츠담 회담의 결의에 따라, 베트남의 일본군 무장해제와 관련해서 베트남의 16도선 남북에 영국군과 중국군이 진주하게 했다.

중국은 베트남에 18만 대군을 보냈다. 장개석은 윈난 성 군벌 루한(盧漢)의 부대를 보냈다. 이 중국 부대가 베트남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국민당 군대는 북쪽에서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파견되었다. 루한의 부대가 하노이에 도착한 것은 9월이었다. 그들은 해방군이기 보다는 차라리 인간 메뚜기 떼와 같았다. 굶주린, 누더기 옷 차림에, 심지어 맨발의 중국 군인들에는 가난한 농촌 소년들이 포함되었고, 누더기 옷차림의 병사들은 자신의 아내 및 아이들을 데려왔다. 그들은 중국에서 하노이로 진군하는 동안 베트남 마을들을 약탈했고, 그들의 바구니에는 오리와 닭으로 가득했고, 소떼를 몰고가기도 했다. 그들은 일단 하노이에 도착하자 마구잡이로 약탈을 시작했다. 그들은 민가와 공공기관에 침입, 전구를 훔쳤고, 문손잡이를 빼갔고, 시장을 통과하면서 과일과 야채를 빼았고, 심지어 비누를 음식으로 착각해서 물어 먹기도 했다. 

장교들도 마찬가지 였다. 그들은 프랑스인 재산을 몰수하고, 무가치한 중국 돈을 지역의 법적 화폐로 지정하여, 약탈을 합법화했다. 

이런 약탈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은 그들을 달래려 했다. 호는 루한에게 아편 파이프를 선물했다.

소식통을 통해서, 호치민은 루한 부대에 주둔 시한이 없으며, 북베트남에서의 혼란을 들어 이곳에 영구 주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한편, 호치민은 장개석이 중군군의 철수를 두고 프랑스와 협상에 이용하려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 장개석이 프랑스와의 협상을 통해서, 중국군이 북베트남에서 철수하는 대신에, 프랑스는 상하이 및 중국 항구들에 대한 특권을 포기한다는 것이었다.

1945년 말, 호치민의 혁명은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프랑스를 지원하기로 결심했다. 소련은 하노이 정부를 인정하지도 않았고, 하노이에 참관인 조차 보내지 않았다. 믿었던 프랑스 공산당 조차도 그를 돕지 않았다. 믿었던 프랑스공산당 당수 모리스 토레즈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를 포기할 의사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한 호치민의 정책적 선택은 프랑스와 타협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1946년 3월의 호치민-생트니 협정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체결된 것이었다. 호-생트니 협정은 1946년 3월 6일에 베트남 민주공화국 대통령 호치민과 프랑스 특사 장 생트니가 체결한 협정이다. 협정은 베트남을 프랑스 연합 내부의 자유 국가로 인정했고, 프랑스가 1951년까지 북베트남에 군대를 주둔하는 것에 동의했다. 

프랑스에 대한 호치민의 타협에 대해, 민족반역자라는 비판까지 제기되었다. 협정을 통해서 호치민은 프랑스가 중국군을 북베트남에서 몰아내 주기를 바랬다.

비판자들에 대해,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당신들은 바보다! 중국의 잔류가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인가? 우리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지난 번에 중국이 왔을때, 그들은 천년 동안 이 땅에 잔류했다. 

하지만 프랑스인은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약하다. 식민주의는 사망 직전이다. 아시아에서 백인은 끝장났다. 

하지만, 만약 현재 중국인들이 잔류한다면, 그들은 절대로 철군하지 않을 것이다. 

나로서는, 평생 중국인의 똥을 먹는 것보다는 프랑스인의 똥냄새를 잠시 맡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참고-

김기협, 호치민이 '민족 반역자' 소리를 들었던 이유는?, 프레시안. 2011년 12월 28일

Stanley Karnow, Vietnam: A History,Penguin Books; 2nd edition (1997), 151-153

by 파리13구 | 2017/10/01 10:40 | Le monde | 트랙백 | 핑백(2) | 덧글(4)


< 이전페이지 다음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