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나의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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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파리13구...

복수의 칼을 가는 숙적을 상대하는 방법은?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비스마르크와 시오도어 루스벨트의 방법?

보불전쟁에서 패한 뒤 복수의 칼을 가는 프랑스를 독일의 비스마르크는 어떻게 상대했는가? 그는 프랑스의 관심이 독일을 향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 프랑스의 해외 식민지 사업을 장려했다.

1907년 캘리포니아 일본인 이민 위기에 직면한 미국의 시오도어 루스벨트의 기본 관점도 이와 유사했다. 일본 확장주의 무대가 필리핀,하와이,캘리포니아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미국은 일본이 확장방향을 한국과 만주로 하도록 유도할 필요가 있었다. 

말하자면,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제국의 확장 방향을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로 향하게 유도했다면, 루스벨트는 일본 제국의 방향을 남방 혹은 태평양이 아닌, 동아시아의 만주로 향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1909년에 상상된 태평양전쟁의 양상은?"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러일전쟁 이후 일본 이민 문제로 미일 갈등이 고조되었다. 

1909년의 어네스트 피츠패트릭의 공상소설, <<국가의 갈등 혹은 미일 전쟁>>이 나온 것은 이런 배경에서 였다. 

이 소설은 태평양의 통제를 두고 미일 양국이 죽음을 대결을 벌이는 것을 그린다. 

전쟁의 발단은 미국 본토의 일본인 이민 중심지 샌 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선원과 일본인 점원 사이의 갈등이다. 

갈등 고조되면서, 갑자기 태평양 연안의 주들에 일본 군대가 출연한다. 일본군은 완전무장한 전쟁 준비 상태로 미국 본토에 출몰한 것이다. 미일 전쟁을 미리 예상한 일본 정부가 5만의 병력을 "육체 노동자"로 위장하여 미국에 미리 잠입시켰던 것이다. 

소설에 따르면, 일본인들은 초기 해상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미국에게 태평양 연안주들의 양도를 요구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미개한 아시아인들에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전쟁은 유럽의 서양 문명과 아시아의 고대 문명의 대결이었다. 

중요한 국면에 영국이 같은 동족을 구하러 왔다. 영국인과 미국인은 앵글로-색슨 문명의 두 친척이었다. 다른 서양 국가들이 중립을 선언할 동안, 영국과 미국 연합국이 결국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동양 문명의 멍에로부터 세상을 구했다.

전쟁이 끝나자, 미영 점령군은 일본인들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우호는 쌍방향적이었다. 종전 협상은 패자에게 불리한 것이 아니었다. 

전승국들은 "일본은 자연적으로 아시아쪽으로 확장할 권리가 있다. 아시아 세력 일본이 아시아 대륙 쪽으로 자연스럽게 확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 전승국들은 일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확장하는 것이 저지된 상황에서, 일본의 자연적 영역인 아시아 대륙으로 일본이 진출하는 것을 막는 것은 부당하다. 일본은 다가오는 세기에 아시아 대륙에서 활동할 수 있고, 정열을 바칠 수 있을 것이다." 


참고-


Akira Iriye ,Pacific Estrangement: Japanese and American Expansion, 1897-1911 (Harvard studies in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2. 167.

소설의 함의?

일본은 미국과의 충돌이 예정된 남방 확장을 포기하고, 아시아 대륙 쪽으로 확장하라.

말하자면,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확장주의가 불가역적이라면,

그 방향을 미국에 유리하게, 아시아 대륙 쪽으로 향하게 유도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것인가?

일본의 한국병합과 미일의 이민자 갈등?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이후 일본이 한국을 보호국으로 만든 뒤에, 한국을 강제로 합병할 때까지 5년이라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은 어떤 배경 때문이었을까? 왜 강산이 반정도 바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된 것인가? 

특히, 국제관계란 관점에서, 1907년-1908년 즈음에는 미국 서부해안을 중심으로한 태평양 일대에서 일본 이민자 관련 갈등이 고조되었다. 미국과 영국 정부가 이민 문제로 일본과의 전쟁을 고심하는 분위기였다.

이러한 적대적인 국제정세에서, 일본은 한국병합이라는 무리수를 두는데 강한 정치적 부담을 느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한국강제 병합은 영국과 미국의 승인이 필요한 국제적 사업이었다. 따라서 일본은 국제상황이 무르익기 전까지 때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고 본다. 

"영일동맹과 미일의 이민자 갈등?"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이리에 아키라의 책을 읽다보니,

영일동맹과 미일의 일본 이민자 갈등의 관계에 대해 알게 되었다.

1902년의 영일동맹 결성에 대해 미국은 긴장했다. 미국 해군은 1902년의 영일동맹 탄생에 대해서 경각심을 가졌다. 동맹은 이론적으로 아시아의 두 나라 강대국 해군의 결합을 의미했다.

미국은 영일동맹의 무력화 방안을 고심했다.

이를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태평양 일대에서의 일본의 확장주의였다. 일본 이민자의 유입으로 하와이와 미국 서부해안에서 인종갈등이 발생했다. 이런 양상은 태평양 일대의 영연방 국가에서도 유사했다.

영일동맹에도 불구하고, 인종갈등이 고조되면, 영국은 영일동맹이라는 전략적 가치보다는, 앵글로-색슨인의 유대라는 인종주의적 가치를 더 강조할 것이라 기대되었다. 일본 이민자 문제에 대해서는 영국은 미국과 한 배를 탄 운명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국은 일본 이민 분쟁을 통해서, 영일동맹을 견제할 수 있었다.

실제로 비슷한 시기에 캐나다 뱅쿠버에서 반일 폭동이 발생하자, 미국 당국자들은 "환호"했다.


참고-

Akira Iriye ,Pacific Estrangement: Japanese and American Expansion, 1897-1911 (Harvard studies in American-East Asian relations), Harvard University Press,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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