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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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13구 | 2018/12/31 13:12 | 나의 즐거운 일기 | 트랙백 | 덧글(116)
1945년 8월 소련의 선전포고에 대한 일본 육군의 대응은?
키신저의 경고...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이에 따라 소련의 만주 침공이 시작되었다. “사무라이들을 죽여라!”

소련의 선전포고는 일본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8월 9일 나가사키에 2번째 원폭이 투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가사키 원폭 보다는 소련과의 전쟁이 일본 지도부의 주된 관심사였다. 

8월 9일, 오전 11시가 되기 얼마전,전시 일본의 최고의사결정 기구인 최고전쟁지도회의 the Supreme War Leadership Council, 즉 6인회의 the Big Six가 황궁 지하벙커에서 열렸다. 회의 도중인 오전 11시 30분, 나가사키에 두번째 원폭이 투하되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하지만 나가사키 원폭은 이날 회의 내용에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고 한다. 회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나가사키 원폭의 영향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 이날 회의에서, 도고도 도요다도 나가사키 원폭에 대해서도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았다.

8월 9일에 관한, 다수의 일본의 정계 지도자들의 일기에는 나가사키 원폭투하를 기술한 것은 의외로 적고, 소련참전 일색으로 도배되어 있다.소련 참전의 충격이 컸던 것이다. 

[가토 기요후미, 대일본제국 붕괴,바오,2010.p.48.]

그렇다면,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에 대한 일본 육군의 대응은 어떤 것이었을까? 

<일본 육군> 

육군 중에서도 중견 엘리트층이 가장 강경한 주전파였다. 그러나 소련참전이라는 엄중한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본영 육군부 내에서는 소련참전의 제1보가 날아들자 즉시〈소련의 참전에 따른 전쟁지도대강>이 작성되었는데, 놀랍게도 여기에는 아직도 전쟁의 계속과 ‘황실을 중심으로 하는 국체호지 國体護持 및 국가 독립유지를 최소한’으로 해서 소련을 통한 화평교섭을 계속한다는 것을 방침으로 삼고 있었다. 게다가 여기서 중요한 움직임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계엄령 시행을 통한 군사정부 수립이라는 쿠데타 계획의 부상이었다. 

가토 기요후미, 대일본제국 붕괴,바오,2010.pp.48-49.

by 파리13구 | 2017/02/26 18:14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장개석, 친중파 임시정부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원했나?
장개석,모택동 그리고 스탈린!


배경한의 논문에 따르면, 1942년 다른 국민당 일부 간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에 적극적이었지만, 장개석으로 그렇지 않았다고 한다.

장개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 1942년 12월 중순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 비서처, 송자문에게 보낸 편지라 한다. 

장개석이 승인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높여, 이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지원을 통해 친중파로 만들고, 이 친중파 임시정부를 통해서 전후 한반도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12월 중순
중국 국민당 중앙집행위 비서처, 송자문에게 편지

장개석은 임시정부 승인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이고 관망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12월 중순 國民黨, 중앙집행위 비서처에서 송자문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임시정부 승인의 시기를 되도록 늦출 것을 지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개석과 국민정부의 임시정부 승인에 대한 유보적 입장은 미국측 외교문서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나 1942년 초 중경 주재 미국대사 가우스는 국무성에 보낸 보고서에서, “중국 측이 한국임시 정부 승인을 주저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현재의 임시정부가 일부세력만을 지지 기반으로 삼고 있어서 임시정부를 승인할 경우 다른 세력들도 또 다른 정부를 만들 우려를 중국 측이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당시의 임시정부가 한국의 독립운동세력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장개석과 국민정부는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장개석과 국민정부 측에서 임시정부 측에 독립운동세력의 통합과 단결을 여러차례 주문하기도 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장개석나 국민정부가 임시정부의 대표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을 이유로 승인 불가를 주장하는 중국 측의 입장은, 다른 측면에서보자면 임시정부가 독립운동세력을 대표할만한 자격을 가지도록 만들고 그런 다음 그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을 통하여 전후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중국 측의 계산된 의중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뒤에서도 상술하겠거니와 실제로 일본 패망 직후인 1945년12월 국민 정부 외교부에서 마련한 한반도 정책 속에는 한국독립당(실제로 중경 임시정부)을 중심으로 하는 친중 親中 분자를 한국내에 부식扶植하는 방안을 적극 추진해야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었으니, 이것은 바로 임시정부를 통한 전후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행사라는 국민정부의 의도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배경한. "중일전쟁시기 蔣介石ㆍ國民政府의 對韓政策." 역사학보, 208 (2010.12),pp.282-283.

by 파리13구 | 2017/02/26 13:50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장개석과 한국의 독립문제
장개석,모택동 그리고 스탈린!


 

구대열에 따르면, 장개석과 한국의 독립과의 관계는 다음으로 해석 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중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는 의도나 계획은 처음부터 전혀 없었고 독립 운동가들에게 개인적인 약간의 재정지원을 하는 것을 기화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회복을 위해 국내외 상황을 철저히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구대열한국국제관계사 연구 2: 해방과 분단’, 역사비평사 1997, pp. 86-131, ‘국민당정부의 전시 대외정책과 한반도 및 임정 및 광복군 통제정책참조]

by 파리13구 | 2017/02/26 01:38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일본 패망 그리고 처칠과 장개석의 동상이몽...
키신저의 경고...


<장개석> - 카이로에서 돌아온 장개석은 처칠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처칠과 장개석>

일본 패망 그리고 처칠과 장개석의 동상이몽...

장제스는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영국이 점령하고 있는 홍콩은 즉각 반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시아에서 영국이 물러간 그 자리에 중국의 영향권울 만들 계산을 하고 있었다.

처칠은 이런 장제스를 좋게 보지 않았다.

 “장제스는 마오쩌둥軍과의 정권다툼에 분명 더 신경을 쓰고 있으면서 일본군에 대한 작전을 엉망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중국군사령관으로 가 있는 스틸웰 장군이 바로 그런 보고를 내고 있지 않은가. 버마작전에 발을 뒤로 빼면서도 연합국에 대해서는 버마작전을 왜 빨리 서둘지 않느냐고 헛소리를 지르고 있다.” 처칠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이 물러간 후 버마,말레이,싱가포르 같은 英연방을 장제스는 눈하나 깜짝 안하고 중국영향권으로 편입하려 한다고 처칠은 경계했다.


정일화, 카이로선언- 대한민국 독립의 문, 선한약속,2010.p.457.
by 파리13구 | 2017/02/26 00:50 | Le monde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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