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나의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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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파리13구...

레이 황, "역사가의 임무란?"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기본적으로 역사가의 임무는 이미 알려진 것으로부터 잃어버린 고리를 발견하는 일이다."

-레이 황, 장제스 일기를 읽다, 푸른역사,2009. 19.

일본 제국과 동경 제국대학의 영향력?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18년과 1945년 동안

일본제국의 총리와 장관의 출신 학교를 분석해 보면 다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출처-
James L.Huffman, Modern Japan-A History in Documents,Oxford University Press,2004, ,113

30년대 이후 일본 군부의 폭주에도 불구하고,

동경대 출신 비율이 이 정도였다는 것이다. 특히 장관 비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이었다.

일본 제국의 신비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최고의 대학을 나온 일본 최고의 두뇌들이 , 어떻게 일본을 패망으로 이끌었는가라는 것이다.

60년대 미국에서 케네디 시대의 최고의 인재들이 벌인 것이 베트남이라는 비극이었다면,

30년대 일본 최고의 인재들이 벌인 것이 결국 태평양 전쟁이었고, 이것이 일본 제국을 멸망에 이르게 만든 것인가? 

왜 30년대와 40년대 초반 일본 엘리트들은 일련의 편집증적인 광기에 사로잡힌 것인가? 

[23년] 소련의 극동전략과 손문?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20년대초 손문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 외세의 지원을 원했지만, 그 노력은 늘 실패했다. 이러한 고립무원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은 바로 레닌 사망 직후의 소련이었다. 이같은 상황은 1930년대 후반에도 반복되는데, 장개석이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수난 중일때, 그의 최대 후원 세력은 스탈린의 소련이 될 것이었다.

그렇다면, 소련이 아직 중국혁명의 위대한 아버지가 되기 전의 손문을 지원한 이유는 무엇인가? 조너선 스펜스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923년, 광저우의 군사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쑨원은 원조가 필요했으며 소련은 기꺼이 이를 제공하고자 했다. 이러한 소련의 입장 배후에 있는 전략적 사상은, 세계혁명을 자극하려는 욕망과 자국의 국경선을 안전하게 보장받으려는 욕망 사이의 긴장에서 비롯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소비에트의 안전을 위협하는 가장 큰 세력은 이미 19〇4~1905년 전쟁에서 러시아를 물리치고 소련의 남쪽국경인 만주의 지배자가 되어 가고 있던 철저한 반공 反共 사회인 일본임이 분명했다. 쑨원은 만주를 가로질러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는 주요 연결로가 되는 동청철도를 중•소 합작으로 경영하는 데 지원할 것을 표명했다. 결국 일본의 야망을 제지할 만큼 중국이 강력해지는 것이 소련에게 유리했다. 동시에 소련은 베이징 정권과 북부의 다른 군벌들과도 외교협상을 계속하여 1924년 초에 중국의 외교적 승인을 받아냈다. 그러나 소련의 관찰자들은 화북에 국가를 통일시킬 만큼 강력한 인물이 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게다가 돤치루이를 통 한 일본의 책략과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는 중국이 결국 일본의 노예가 될 운명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또한 소련은 당시에 중국 공산당 세력을 믿을 수 없었다. 1923년까지 중국 공산당은 아직도 형성단계에 있었고, 국가를 이끌기에는 너무나 취약했다. 

출처-

조너선 스펜스, 현대중국을 찾아서 1, 이산, 1998. 392.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을 둘러싼 국제질서는 1922년의 워싱턴 조약파와 소련의 대립에 의해 규정되었다.

미국,영국,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워싱턴 세력은 21-22년 워싱턴 회의에서 소련을 배제시키고, 극동에서의 새로운 질서 형성을 모색했다. 하지만, 소련은 코민테른을 통해서 중국의 손문에게 접근, 중소관계를 발전시키면서, 극동에서의 소련 권익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중국을 평등하게 대접한 첫 서양 강대국은?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중국 국민당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방문한 나치 돌격대와 히틀러 청소년단.


제1차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극동을 둘러싼 국제관계가 중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우선 미국의 우드로 윌슨과 소련의 레닌이 극동에서의 구태, 제국주의 외교를 비판하고, 이상주의를 표방하는 새로운 외교를 주장했다. 

전후 중국에서의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중국과 처음으로 평등한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는 독일이었다. 패전으로 인해서 평화조약을 강요받았고, 중국의 산둥 반도를 빼앗긴 독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무역관계 회복을 원했다. 

1920년 가을, 독일 관리들이 중국과의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에 나선 것은 이러한 상황에서 였다. 그들은 치외법권의 폐지, 중국의 관세 주권 회복에 동의할 준비가 되었다. 단, 중국이 무역에 대해서 독일을 최혜국대우해주고, 중국 내의 독일 자산에 대한 압류를 중단한다는 조건에서 였다. 1)

베이징의 중국 외무부는 시의 적절하게도 이 조건에 동의했고, 양국은 새로운 협정에 1921년 5월에 서명했다.  

21년의 중국-독일 협정은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었고, 특히 군사 분야에서의 양국의 협력을 가능하게 했다. 양국의 우호 관계는 히틀러의 독일 정부가 중국문제에서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들기 시작한 1938년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1938년에 독일이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들면서, 장개석의 중국에 대한 최대 후원 세력은 스탈린의 소련이 되었다. 2)

1) Akira Iriye, After imperialism: the search for a new order in the Far East, 1921-1931,Imprint Pubns (November 1, 1990) ,13

2) Antony Best , Imperial Japan, in Robert Boyce,‎ Joseph A. Maiolo (eds.), The Origins of World War Two: The Debate Continues,  Palgrave; 2003,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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