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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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13구 | 2016/12/31 04:54 | 나의 즐거운 일기 | 트랙백 | 덧글(98)
조지 캐넌,"모택동을 제2의 티토로 만들자!"
장개석,모택동 그리고 스탈린!


[중국혁명][국공내전]
[쐐기전략]
[조지 캐넌]
[스탈린][모택동]


1946년부터 격화된 장개석의 국민당과 모택동의 공산당의 국공내전을 소련과 미국의 외교전략이란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될까?

중국의 국공내전은 소련과 미국의 쐐기전략간의 충돌의 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쐐기전략은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었다.

쐐기전략 이란? 

신흥공산국가인 중국이 티토의 유고와 같이 서방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소련의 영향권 하에 묶어두려는 전략을 스탈린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쐐기전략은 스탈린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동시에 미국도 자신의 쐐기전략을 통해, 모택동과 스탈린간의 이이제이를 추구했던 것이다.

당시 미국측의 쐐기전략을 대표하는 것이 조지 케넌의 동아시아 전략사상이었다.

케넌의 동아시아 전략은 봉쇄정책이란 틀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팽창을 막는다는 것이 지상의 목표였다.
소련에 대한 모택동의 민족주의를 자극, 중국을 소련 팽창 저지를 위한 미국의 동반자로 만들자는 구상이었다. 1950년 1월의 애치슨 연설은 이러한 미국의 쐐기전략을 구체화시킨 것이었다.  

케넌은 미국판 쐐기전략, 즉 중국이 소련의 동맹권으로 흡수되지 않도록 만들어, 모택동을 아시아의 티토로 만든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조지 케넌의 쐐기전략을 김영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지 케넌과 쐐기전략>

미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친대만세력들의 장개석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요구에도 불구하고 트루만 행정부는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모택동의 승리가 구체화되었을 때, 케난은 공산중국과 소련의 관계를 이간질시켜 중국이 소련의 동맹권으로 흡수되지 않도록 하는 쐐기전략(wedge strategy)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소련은 연해주 지방의 경제적 발전을 위해서 만주의 자원을 필요로 할 것이다. 또 소련은 만주와 신강 지역을 소련 주변에 위치한 완충지역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공산중국에게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케난은 보았다. 일본과 장개석에게 맞서 싸울 때에는 중국공산당이 소련에 의존하고 그 지시를 따르는 것이 중국의 민족주의와 소련 사이의 이해관계의 일치로 인하여 커다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공산혁명 성공 이후 소련의 중국에 대한 여러 가지 요구들은 중국의 민족주의적 성향을 자극하여 긍극적으로 중소관계는 악화될 것이라고 케난은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을 역이용하여 미국은 대중국 쐐기전략을 추구하여 유고의 티토와 같이 모택동으로 하여금 독자노선을 추구하도록 하여 소련세력권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나아가 케난은 쐐기전략의 성공적 추진을 위해서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반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그러나 1949년 6월 30일 모택동이 대소일변도정책을 선언하고 중소동맹조약의 체결을 통하여 소련의 동맹권으로 편입됨으로써 케난의 쐐기전략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 그의 전략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공산중국에 대한 경제원조와 같은 유인책을 동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공화당의 일부 상하원 의원들을 비롯한 친대만세력들의 반대 때문에 이 수단을 쓸 수 없었다. 미국내의 친대만세력들은 미국이 중국내전 당시에 장개석을 충분히 지원했다면 중국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공산화 이후에 오히려 모택동을 원조하려는 발상을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아가 그의 주장은 미국이 중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는 것을 대중국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비판하는 국내 여론의 움직임 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후 케난은 중국의 유엔가입 카드를 한국전쟁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것을 다시 제안했지만 침략자에게는 어떠한 대가도 지불해서는 안된다는 트루만과 애치슨의 반대에 부딪혀 그의 주장은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대중국 쐐기전략을 통하여 소련의 팽창에 대항해야 한다는 케난의 발상은 미국 내에 잠재되어 있다가 베트남 전쟁 이후 닉슨과 키신저에 의한 미중관계 정상화를 통하여 그 결실을 맺게 된다. 

참고-

김영호, 동아시아와 케난의 딜레마,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한국과국제정치(KWP)> 14권2호 (1998) pp. 263-265

by 파리13구 | 2015/08/30 12:53 | Le monde | 트랙백 | 덧글(1)
이승만에 대한 맥아더의 립서비스? 1948년
장개석,모택동 그리고 스탈린!



1948년 8월 15일
맥아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식에 참석했다. 

맥아더는 이승만이 남한의 대통령으로 취임하던 날 딱 한 번 한국을 방문했으며,그때 이승만이 미군의 지원에 대해 묻자 남한이 공격을 받는다면 미국은 “캘리포니아 주를 방어하는 것처럼” 남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거라고 다소 거만하게 약속했다. 물론 워싱턴의 누구와도 협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무심코 던진 인사치레에 불과했다.

한국문제에 대한 맥아더의 속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1945년-1950년까지 맥아더는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맥아더는 그의 보좌관 포비안 바워즈 Faubion Bowers 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 “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걸세. 국무부 소관이거든.” “국무부가 원한 것이기도 하고 실제로 또 그렇게 했어. 그쪽이야 권력을 가지고 있지,물론 난 아니지만. 국무부라면 보고 싶지도 않아. 빌어먹을 외교관들은 전쟁을 만들고 승리는 우리가 일구어야 할 몫이지.내가 왜 그들을 구해줘야 하지? 하지(남한 주둔 미군 사령관)를 도와주지 않을 거야. 스스로 해결하게 내버려둬야지.” 

출처-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한국전쟁의 감추어진 역사, pp.95-96


by 파리13구 | 2015/08/30 06:55 | Le monde | 트랙백 | 덧글(1)
"한국전쟁은 미중견제를 위한 스탈린의 작품이었다?"
장개석,모택동 그리고 스탈린!

[한국전쟁]
[쐐기전략]
[스탈린][모택동][김일성]


4선 국회의원 출신 이세기가 6·25 전쟁과 중국 스탈린과 마오쩌둥 제압전략,나남,2015년 을 발간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을 스탈린의 쐐기전략이란 관점에서 해석했다.

쐐기전략 이란? 

신흥공산국가인 중국이 티토의 유고와 같이 서방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소련의 영향권 하에 묶어두려는 전략을 스탈린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이세기에 따르면, 스탈린은 모택동이 제2의 티토가 될 것이라 우려했다. 특히 미국이 애치슨 선언을 통해 미국의 대만 불개입을 선언하면서, 모택동에 대한 구애에 나서자, 미중 접근 가능성에 대해 더 우려하게 되었다. 스탈린은 미국의 정책 변화가 중미관계 정상화에 대한 대가로서, 중국과 미국이 타이완 해방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려 했다. 이는 스탈린에게 최악의 악몽이었다.

이러한 악몽을 방지하기 위해서, 스탈린은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승인,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간의 전쟁을 유도, 미중 접근의 가능성을 없애고, 소련에 대한 중국의 의존도를 높여서, 모택동이 제2의 티토가 되는 것을 막는다는 전략을 수립,실천했다는 것이다.

미중간의 이이제이를 위해서, 스탈린은 북한군의 신속한 승리를 원치 않았고, 미국의 한반도 개입을 위한 시간을 벌어주었고, 미국 참전 후에는 한반도에서 미-중간의 충돌을 극한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위한 증거로 다음을 제시했다고 한다.

소련 대표가 유엔군 참전을 결의한 안보리 회의에 불참

소련의 도하장비 제공 지연으로 인한 북한군의 3일간의 서울 체류. 

소련 군사고문단의 전투 현장 지휘 회피, 통신장비의 사용 제한 등...
by 파리13구 | 2015/08/29 23:51 | Le monde | 트랙백 | 덧글(3)
클라우제비츠, 전쟁의 국민화의 역설?
역사가 마거릿 맥밀런 Margaret MacMillan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 이후 전쟁은 국민 모두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전쟁이 전국민의 참여가 수반되는 총력전이 되면서, 국민동원을 위해서는 적국을 악마화해야만 했고, 악마화의 결과로 타협 보다는 무조건 항복을 통한 종전을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악마는 타협이 아닌 제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쟁을 더욱 끔찍한 것으로 만들었고, 협상을 통한 전쟁 종식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악마화된 적에 맞서 무조건 항복을 통한 무제한적 승리를 요구하는 여론에 직면한, 책임있는 정치인의 자세는 무엇인가? 무제한 전쟁을 탄력적으로 추진하는 것인가 아니면 제한전인가? 어떻게 총력전 시대의 정치인은 전쟁을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의 연장으로 만들 것인가? 어떻게 전쟁을 양측의 절멸이 아닌, 다른 형태의 정치로 만들 것인가? 

존 미어샤이머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18세기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무대에 등장하기 전에,강대국 간 전쟁에서는 범위와 수단이 모두 제한되었다. 당시의 왕조 국가들이 참여한 이 전쟁들은 케넌이 선호하는 종류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민족국가가 등장하면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민족국가에서는 인민과 국가 사이에 탄탄한 결속이 존재하며,많은 시민들이 기꺼이 군대에 복무하고 심지어 극단적인 비상사태 시기에는 숭고한 희생까지 감내한다. 나라를 위해 기꺼이 복무하는 이런 태도는 국민군이 확대되고 상당한 상비군을 보유하는 경향이 생길 것임을 의미하는데,이것은 다시 국민군이 총력전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게 될 것임을 뜻한다. 게다가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가 말 한 것처럼,대중군 mass army이 서로 충돌할 때 그 결과는 “원시적인 폭력과 증오,적의”이다. 이런 식의 적대가 존재하면 양쪽은 서로 격분하게 되며 결국 결정적인 승리를 요구하면서 타협적인 해결을 거부하게 된다.

각국 정부가 보통 강대국 간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막대한 희생을 유도해야 하는 사실 때문에 이런 상태는 더욱 심해진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상당수 시민들이 조국을 위해 군대에 복무하고 나아가 목숨을 바칠 정도의 확신까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근대 전쟁에서 지도자들이 국민들을 싸우게 고무시키는 한 가지 방식은 적을 악의 전형이자 나아가 치명적인 위협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케넌이 생각한 것처럼 민주주의 국가에만 국한되는 게 아님을 지적해야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하면 전면적인 승리에 미치지 못하는 전쟁 종식을 교섭하기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어쨌든 악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적과 어떻게 교섭을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적을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이끌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게 훨씬 타당하다. 물론 양쪽 모두 항상 이런 결론에 다다르며,따라서 교섭을 통한 타협을 기대하는 건 불가능해진다. 


참고-

조지 F. 케넌, 조지 케넌의 미국 외교 50년, pp.58-59



by 파리13구 | 2015/08/29 22:21 | Le monde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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