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나의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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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교, 역사비교를 통해, 올바른 사회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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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자 파리13구...

프로이센의 3등급 선거제도 Le monde

프로이센의 3등급 선거제도 
the Prussian three-class voting system

1849년에 제정된 3등급 선거제도는 이전의 선거제도와는 달리 재산이나 소득이 없는 자들에게도 선거권을 부여하여 적어도 성인남성들에게는 보통선거의 원칙을 구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보통선거가 실제로 큰 효과가 없었던 것은 엄격한 불평등선거제도였기 때문이다. 프로이센에서는 의원을 선거인단이 선출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선거인을 선출하는 유권자를 납세액에 따라서 세 개의 집단으로 나누었다. 1850년을 기준으로 1등급에는 유권자의 4.7%인 15만 3천명, 2등급에는 12.6%인 40만 9천명, 3등급에는 82.7%인 2백 69만 천명이 속했고 각 등급은 해당선거구의 선거인을 3분의 1씩 선출하였다.

- 독일제국은 결국 전쟁이 한창인 1917년에 3등급 선거제도의 폐지를 약속했다. 전쟁을 위해서는 3등급의 지지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1914년의 준비되지 않은, 낯선 총력전? Le monde

1914년의 준비되지 않은, 낯선 총력전?

1914년 7월의 주요 교전국들은 그들의 병사들이 성탄전 이전에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유럽의 선진 산업 사회는 1914년의 장기 소모전의 경험이 없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랜 평화상태가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영국군은 유럽전쟁 발발시 10만 병력의 동원을 예상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300만 병력을 동원했다. 프랑스는 800만을 동원했고, 18-40세 사이의 남성인구의 62.7%를 동원했다. 

프랑스 재정은 1913년 50억 프랑에서 1918년 1900억 프랑으로 확대되었다. 당시 전쟁채권에 대한 이자를 위해 70억 프랑을 지출했다. 1918년에 프랑의 가치는 전쟁 전 대비 1/6이 되었다. 

- Robert O. Paxton,Europe in the Twentieth Century, 84.

한국전쟁과 서독, 타이완 위기와 일본? Le monde

역사는 유추를 통해 과거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한다. 유추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와 비슷한 과거 상황이 어떤 사건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최근의 타이완 위기와 일본 개헌 문제에 대해 역사적으로 생각하기 위한 과거는 1950년의 한국전쟁과 서독 재무장이 될 수 있다. 
만약 내가 1950년 프랑스 지도자였다면, 숙적 독일이 패전 몇 년만에 재무장한다는 문제에 대해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국민감정을 이유로 서독 재무장을 반대했어야 했는가? 아니면 현재와 미래에 프랑스 안보를 위협하는 것이 소련이며, 과거의 적 독일은 감정상의 적이지만, 미래의 숙적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을 중시해야 했을까. 심지어 프랑스가 당시 반대했고 하더라도 나토의 중심국 미국과 영국이 서독의 재무장을 포기했을까.

실제로 프랑스는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1950년 10월 프랑스는 플레방 계획을 제안, 유럽의 다국적군에 독일군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  참고
Henry Kissinger,Leadership,Penguin Books, Limited,2022. 57.

- 1950년 10월에 서독 재무장을 주장한 프랑스인은 '토착 친독파'라는 욕을 먹었을까? ㅠ

네빌 체임벌린과 케네디? Le monde

네빌 체임벌린과 케네디?

1938년 9월 28일

주데텐란트 위기로 인한 전쟁 위기가 최고조에 도달했다. 런던의 주요 건물은 모래주머니의 보호를 받고, 시민들에게 방독면이 배급되었다.

같은 날, 하원에서 네빌 체임벌린은 위기에 대한 영국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연설을 했다.

이날 하원에는 외교대표단 좌석에 얀 마사리크 체코슬로바키아 대사가 있었고, 몇 좌석 옆에 디르크센 독일 대사가 착석했다. 프랑스와 소련 대사도 하원에 왔다. 미국대사 조셉 케네디는 21세의 아들과 같이 왔다. 존 F. 케네디  John F. Kennedy.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케네디의 졸업논문 주제가 되었다.   케네디는 1940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 학사학위 논문으로〈영국은 왜 잠자고 있었는가 Why England Slept〉(1940)를 제출했고, 다음을 주장한 바 있다.

민의에 입각한 통치란, 외교정책을 효율적으로 수립하는데 선뜻 도움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국 미국 같은 민주주의 국가는 조국이 존망의 위기에 처해있다는 공포감이 확고히 자리 잡아야만, 대의명분을 위해 사리사욕을 버리라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1930년대 영국에서, 거의 모든 집단이 재무장을 원하고 있었지만, 어느 집단도 이를 위해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38년 뮌헨협정으로 귀결되었다는 것이다. 

케네디는 자신의 학사논문을 미국인에게 보내는 경고라고 간주했다. 즉 미국은 영국의 잘못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케네디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민주주의 방식이야말로 최선이라는 논리야 말로 위험하다. 정확히 무슨 이유로 민주주의가 더 우월하다는 것인가?
민주주의 체제가 우월한 까닭은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완전한 계발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민주주의가 우리 입맛에 더 맞는 통치 체제라는 것만을 시사할 뿐,
당면한 세계 문제를 대처하기에 가장 좋은 통치체제는 아니라는 점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즉 그 안에서 살아가기에는 좋은 통치 체제일 수 있지만, 그 약점들 또한 대단하다.

우리는 이 땅의 민주주의를 보존하고 싶어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상황을 지금보다 훨씬 현실적으로 보아야 한다.

- 이 논문에서 케네디는 영국이 1930년대에 스스로 재무장할 기회를 놓침으로써 뮌헨에서 유화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는 점을 밝힌다. 하지만, 영국이 이같은 패착에 몰리게 된 책임을 볼드윈, 체임벌린 등 두 총리의 지도력이 취약했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재무장 문제에, 민주주의는 파시즘에 비해 불리한, 체제적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지적이었다.

- 하지만 최근의 유화정책 연구성과에 따르면, 1930년대 영국정부는 히틀러의 부상에 맞서 나름의 재무장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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