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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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13구 | 2018/12/31 13:12 | 나의 즐거운 일기 | 트랙백 | 덧글(118)
[1969년]모택동의 한마디...
키신저의 경고...


1969년 3월, 소련과 중국이 국경이 접하는 우수리 강에서 군사적으로 충돌했다. <중소분쟁>

4월 28일

모택동, 중국공산당 9차 중앙위원회 회의 연설 : “더 많은 인민들과의 연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우리 모두가 신중하고,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다른 나라의 영토를 침범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외세의 침략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약간의 땅을 포기하는 것을 선호한다. 중국은 작은 나라가 아니다.“ 마오는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 보다는 내부적 통일과 국제 평화가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모택동은 신중함을 강조하면서 과거의 호전적인 수사와 거리를 두었다. 


참고-

Jeremi Suri, CONVERGENT RESPONSES TO DISORDER: CULTURAL REVOLUTION AND DETENTE AMONG THE GREAT POWERS DURING THE 1960S,422-423.
by 파리13구 | 2017/06/25 10:11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장하석의 한마디...
[교육]수용력이 창의력을 이긴다!

“제가 역사를 배울 때도 그랬습니다. 학교 다닐 때 역사를 정말 싫어했어요. 지금은 과학철학, 과학사를 하기 때문에 사학가가 됐지만(웃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들을 주입시키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죠. 미국 유학을 가서야 아 역사는 사실을 암기는 과목이 아니라, 인간의 과거를 이해하는 과목이구나, 인간이 왜 이렇게 사는가를 알게 하는 과목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되면서 상당히 재미있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국민한테 과학을 조금이라도 가르쳐서 4차 산업혁명을 융성하게 한다. 이거는 말이 안됩니다.”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장하석 케임브리지대 석좌교수 인터뷰 전문,경향신문, 2017-6-24


- 우리의 역사교육에서

얼마나 많은 장하석 "들"이 있을까? ㅠ

만약 역사교사들이 4차 산업혁명을 가르친다면,

그 교육의 핵심은 다시 한번 "암기"가 될까? 
by 파리13구 | 2017/06/25 08:15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문화대혁명과 홍콩 그리고 모택동"
키신저의 경고...

<모택동 어록이 담긴 붉은 수첩을 들은 홍콩의 시위대
1967년 5월 16일>

1967년 문화대혁명이 한창이던 중국은 홍콩 문제를 '힘'로 해결할 수 있있다. 힘도 있었고, 명분(반-제국주의)도 있었다. 하지만 모택동의 판단은 어떤 것이었을까?  

1966년에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4대악 타파를 목표로 했다. 낡은 사상[舊思想], 낡은 문화[舊文化], 낡은 풍속[舊風俗], 낡은 관습[舊習慣]을 타파(打破)하려 하다가 중국을 막장의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문혁을 혼란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자제의 움직임이 포착될 수 있는 것은 홍콩 문제였다. 홍위병은 홍콩에서의 영국 제국주의 타도를 주장하고, 광저우의 인민해방군은 홍콩 침공을 준비하는 상황에서, 1967년 홍콩의 친중 좌익세력은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1967년 5월에 시작된 홍콩 좌익 봉기는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 사태였다. 작은 노동쟁의로 시작된 사건이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했다.  시위대가 홍콩 경찰과 폭력 대치했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홍콩 좌익이 낡은 관습인 영국의 제국주의 타도를 위해 봉기한 것이었다. 이 봉기는 좌익이 폭탄 테러에 나서면서 더욱 폭력적이 되었다.

대륙의 홍위병은 홍콩 좌익과의 연대를 위해서, 6월 100만 홍위병이 베이징의 영국 임시공사관에서 항의 시위를 했다. 8월에는 베이징의 영국 임시공사관이 방화 공격을 받았다. 

한편, 중국 인민해방군 광저우 지역 사령관, 황영생  Huang Yongsheng (그는 린바오 -Lin Biao,임표-의 최측근이었다)이 비밀리에 홍콩 침공 및 점령을 제안했지만, 중국총리 주은래가 이를 거절했다. 

문혁과 홍콩을 둘러싼 혼란 속에서, 주은래가 모택동 주석에게, 홍콩을 영국으로부터 되찾을 때가 온 것인지 물었다. 그러자 모택동은 아직 때가 아니다고 했다. 마오는 1997년까지 영국의 홍콩 지배를 보장한 조약의 약속을 지킬 것이라 다짐했다. 

결국 주은래 총리는 홍콩에서의 봉기의 즉각적인 중단을 지시했다. 홍콩 봉기는 이렇게 끝장났다. 


참고-

Ching Cheong, "Is a Sub-Cultural Revolution Threatening Hong Kong?", The NewYork Times, MAY 5, 2017

위키백과, Hong Kong 1967 leftist riots.


문혁 시절의 모택동 조차도 조약의 약속, 특히 영국 제국주의의 강압에 의한 역사적 굴욕의 산물이라 하더라도, 조약의 의무에 충실하려 했다. 

적어도 홍콩 문제에 관련해서는 모택동에게 다음 격언은 역시 진리였다 ; 팍타 순트 세르반다(pacta sunt servanda) 즉, 약속은 지켜져야만 한다.
by 파리13구 | 2017/06/25 07:55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1967년]서독과 중국 협상에서 논의된 것.
키신저의 경고...


1967년, 빌리 브란트 외무장관의 서독은 유럽에서 긴장완화 정책을 추진 중이었고, 중국은 중소 갈등 심화로 동유럽 소련 위성국과의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다.

67년 5월 9일,서독 외무부의 클라우스 슈츠 Klaus Schütz와 홍콩의 친-공산당계 신문 편집인 페이 이밍 Fei Yi-Ming이 접촉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였다.

페이는 중국이 서독과의 관계개선을 원하는 이유로 다음을 제시했다.

첫째, 중소 갈등이 루비콘 강을 건넜다는 것이다. 모스크바는 공산주의 발전에 관심이 없고, 중국의 자원을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채우기 위해 착취하려고 한다. 베이징은 새로운 친구가 필요하고, 이는 소련의 적대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중국과 동독의 관계가 최근에 험악해졌다. 모스크바는 마오의 중국을 비난하라고 동유럽 위성국들을 압박한다는 것이다. 동유럽과 중국의 경제,문화 교류가 중소 갈등 때문에 쇠퇴했다. 따라서 베이징과 서독의 본은 동독과 소련이라는 같은 적을 가진다.

셋째, 중국은 서독의 상품을 원한다. 중소 분쟁으로 인한 사회주의권으로부터의 중국의 외교적 고립과 더불어, 문화대혁명에 의한 중국 내부의 혼란 상태에서,베이징은 외국의 산업 상품을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유럽의 산업 강국 서독이 상품을 원하는 중국의 이상적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Jeremi Suri, CONVERGENT RESPONSES TO DISORDER: CULTURAL REVOLUTION AND DETENTE AMONG THE GREAT POWERS DURING THE 1960S, dissertation , Yale University,2001.409-410
by 파리13구 | 2017/06/24 20:10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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