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나의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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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도발과 영국 유화정책의 배경?"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뮌헨 협정에서의 유화정책을 히틀러에게 놀아난 네빌 체임벌린의 부적절한 행동으로 이해하는 것이 대세를 이룬다. 이는 영국의 유화정책을 히틀러에 맞선 유럽정책으로 이해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유화정책은 유럽정책을 넘어선, 세계정책이었고, 극동에서의 일본의 도발의 영향을 받았다. 

1931년의 만주사변과 1933년 히틀러의 집권 이후, 영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현상유지를 파괴하려는 세력의 도전을 받았다.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서 영국은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지만, 미국은 고립주의를 고수했다. 

힘의 한계에 직면한 영국은 일본 견제 보다는 극동에서의 자신의 권익을 유지하는 데 만족해야할 처지였다. 영국의 권익에 대한 위협은 지중해에서 이탈리아, 유럽대륙에서 독일도 제기했다. 

동아시아에서 가능한 한 자신의 방식으로 현상유지를 위해 노력했던 영국은 이와는 다른 방법으로 유럽에서도 같은 일을 했다. 적어도 당분간, 영국은 독일에 대해 유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중국에서의 일본의 행동 보다는 라인란트,주데텐란트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의 독일의 그것이 확실히 더 나은 사례로 보일 정도였다. 말하자면, 일본과는 달리, 유럽에서 독일은 자신의 행동에 최소한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럽에서와 달리 영국이 일본에 대한 유화를 할 수 없었던 것은 미국의 태도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영국의 동맹이 아니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국제 정치의 힘의 분배가 전쟁의 양상을 띈다면, 영국은 미국과의 동맹이 필요할 것이었다.

미국을 눈치를 살폈던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일본에 대해 유화정책을 할 수 없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출처-

Margaret Lamb and Nicholas Tarling, From Versailles to Pearl Harbor: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Europe and Asia, Palgrave; 2001,186. 

[41년]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와 미국의 일본 정책?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41년의 미국과 일본의 평화교섭에서 영국의 아시아 식민지 안전 문제가 쟁점이 되었다. 일본에 대한 미국의 평화 의지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의지를 제약한 것은 아시아에서의 영국의 권익에 대한 미국의 근심이었다. 41년 미국이 태평양에서 일본과의 평화 이상으로 중시한 것은 독일에 대한 영국의 항전이었고, 항전의 지속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극동에서의 영국 권익의 유지였다. 

주일 미국대사 조셉 그루는 다음을 지적했다. : "미국의 안보는 다소간 영국 함대에 의존하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대영 제국의 지원을 받아 유지되어 왔고, 유지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적어도 유럽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패할 때까지 태평양에서의 현상유지를 위해서 분투해야만 한다. "

1941년 7월에, 터너는 주일 미국대사 노무라에게, "세계의 어느 지역에서 이든지, 영국의 장래 안보에 영향을 주는 어떤 사안도 방어적 관점에서 볼때 미국의 관심사이다."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은 싱가폴의 영국 식민지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위협할 수 있다. "만약 영국이 현재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되면, 이는 치명타가 되어 영국 본토 방위의 통일성을 위협하게 되며, 본토가 독일에게 정복당하게 될 것이다." "극동에서 일본의 공격으로 영국이 유럽에서의 전쟁을 위해 인도양과 호주 지역을 통해 입수되는 필요 자원이 차단되어, 영국이 약화된다면, 이는 미국에 대한 간접적 공격에 다름아니며, 따라서 우리는 이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 " 


출처-

Margaret Lamb and Nicholas Tarling, From Versailles to Pearl Harbor: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Europe and Asia, Palgrave; 2001, 178. 

[40년]프랑스 항복과 미국의 아시아 정책?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데이비드 레이놀즈에 따르면, 1940년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2번까지만 임기를 맡는다는 조지 워싱턴의 전통을 깨고 3선에 도전한 것은 같은 해 6월의 프랑스 항복에 따른 위기감 때문이었다. 

1940년 6월의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항복은 일본에게 기회이자 장애물이 되었다. 물론 인도차이나 식민지를 가진 프랑스의 몰락은 일본의 남방 침략을 용이하게 만들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에게 새로운 장애물이 등장했다. 바로 미국이었다. 히틀러의 유럽 지배로, 대서양의 안전을 위협받은 미국은 아메리카 대륙의 안보를 위해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위한 2개의 대양해군 건설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미국은 영국의 저항이 계속되기를 기대했고, 이를 위해서 큰 도움을 제공했다. 이것이 바로 일본이 야심을 가지고 있는 동남 아시아의 중요성을 높였다. 만약 영국의 저항이 아시아와 호주의 인력과 자원에 대한 접근을 통해 유지된다고 한다면, 미국은 일본의 아시아 지배를 막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즉, 영국의 저항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미국은 동남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을 견제해야만 했다. 

Margaret Lamb and Nicholas Tarling, From Versailles to Pearl Harbor: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Europe and Asia, Palgrave; 2001, 170.
   



[41년] 독소전쟁과 영국,일본,미국?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41년 6월 히틀러의 소련 공격 결심은 영국,일본,미국과 어떤 관련이 있을까?

히틀러에 따르면, 러시아의 패배는 항공,잠수함 전쟁 보다 영국의 항복을 압박하는데 보다 효율적일 것이었다. 그의 주장은, 영국이 평화를 맺기 거부하는 이유는 장차 러시아와 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러시아가 영국이 가장 의존하는 요인이라 주장했다. 만약 러시아를 끝장낼 수 있다면,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동맹국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게 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영국의 희망도 산산조각 날 것이었다. 왜냐하면, 소련 세력이 제거되어 일본의 힘이 크게 증가한 극동에서 미국이 전력을 쏟아야 할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즉 극동에서 일본을 상대하느라 미국이 영국을 도울 여력이 없을 것으로 히틀러는 기대했다. 


출처-

Margaret Lamb and Nicholas Tarling, From Versailles to Pearl Harbor: The Origins of the Second World War in Europe and Asia, Palgrave; 2001,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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