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나의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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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년]영국의 3단계 전쟁전략은?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1939년 3월 히틀러가 프라하를 점령했을 때,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끝장났다. 비로서 영국은 히틀러에 대한 양보가 무용지물이란 사실을 알게되었다.

39년 봄, 영국 참모본부 위원회가 이탈리아와 독일에 대한 전쟁 계획을 마련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였다. 이 계획은 2개의 전제를 가졌다 : 프랑스군이 전쟁 초기 서부 전선에서 독일의 진격을 막을만큼 충분히 강해야 한다. 영국은 지상군 지원은 최소한에 그쳐야 했다.

영국은 장기전을 구상했고, 전쟁은 3단계를 거칠 것이었다. 영국 재무부는 만약 독일이 재무장을 위해서 차관을 계속 빌린다면, 곧 파산할 것이라 전망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은 전쟁 초기에 프랑스에 대한 파상 공세를 통해서 전쟁을 단기에 끝내려 할 것이 분명했다. 미약한 수준의 육군력을 가진 당시 영국은 전쟁 초기에 프랑스를 지상에서 크게 도울 수는 없었다. 다만, 이집트로부터 영국은 이탈리아에 대한 반격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전쟁의 제1단계 동안, 극동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영국 함대가 지중해서 이탈리아를 상대할 동안, 이탈리아 세력을 제압하기 이전까지 싱가포르로 함대를 파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쟁의 2단계는 다음과 같았다. 전쟁 전략 대로, 독일의 초기 대공세를 몇 달 동안 저지하는데 성공한다면, 전쟁은 제2단계에 돌입하게 될 것이었다. 연합국은 자신의 자원을 동원할 것이었고, 영국 해군의 재해권 덕분에, 식민지와 중립국 교역국의 자원을 동원할 동안, 경제 봉쇄를 통해 이탈리아와 독일을 굶길 예정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3단계는 개전 2년 후에 시작할 예정이었다. 동원을 완료한 연합국 세력이 독일에 대한 반격에 돌입, 독일의 주력군을 격파할 예정이었다.

출처-

Ferris, J., & Mawdsley, E. (Eds.). (2015). The Cambridge History of the Second World War, VOLUME I- Fighting the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30-31.


결국 프랑스가 불과 수주 만에 독일에 무릎을 꿇은 것이 역사를 바꾸었다. ㅠ

영국 유화정책에 대한 오해의 뿌리는? Le monde

[36년] 서안 사변의 장개석과 스탈린?

대전략과 전략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우선, 대전략의 지리적 범위가 지구적이라 한다면, 전략의 그것은 대륙적이라 정의할 때,

영국의 유화정책은 전략이 아닌, 대전략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말하자면,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비단 유럽의 히틀러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 당시 전세계에 걸쳐 존재했던 해가 지지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안보를 위해 고안된 지구적인 대전략이었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한정된 자원을 가진 상태에서, 자신의 힘으로 대처하기 역부족인 도전에 대해서 대응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했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력이 쇠약해진 마당에, 30년대 중반 이후 독일,이탈리아,일본이라는 3대 파시스트 세력에 맞서 세계적 방어전략을 세워야만 했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의 한계를 가진 영국으로서는 신중하게 대처해야만 했고, 유화정책의 배경이란 바로 당시 체임벌린의 조국이 직면한 세계적 위기에 대한 힘의 한계를 가진 영국의 응전이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 폐결핵과 적폐의 공통점은? Le monde

[전략] 몰트케가 비스마르크에게 한 말?


현명한 군주는 현재의 소요만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르는 소요에 대비해야만 하고, 그런 소요를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소요를 멀리서 일찍이 감지하면 처방을 구하기가 쉽다. 하지만 가까이 오도록 방치하면 처방을 제때 쓸 수 없게 된다. 그때는 치유할수 없는 질병이 되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폐결핵에 대해 말하는 바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이 병은 초기에는 치료하기 쉬우나 ,진단하기가 어려운 데 반해서, 초기에 발견해 적절히 치료하지 않으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단하기는 쉬우나 치료하기는 어려워진다. 국가를 통치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이다. 군주로서 문제를 멀리서 일찍이 인지한다는 것은 오로지 현명한 자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인데, 아무튼 그렇게 문제를 일찍 인지하면 국가에서 일어나는 폐해를 신속히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를 제때 인식하지 못해 사태가 악화되어 모든 사람이 알아차릴 정도가 되면 어떤 해결책도 소용이 없게 된다.

출처-
마키아벨리, 박상훈 역, 군주론, 후마니타스, 2015. 142.


- 전간기 역사에서 히틀러라는 위협도 마찬가지였다.

히틀러의 부상이라는 위협은 초기에 진단은 어려웠지만 억제는 쉬웠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히틀러가 위협이라는 것을 아는 단계가 되면, 진단 조차 필요없는 것이 되었지만, 그 위협의 억제는 어려운 것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히틀러 현상을 조기 진단에서 초반에 다스리는 편이 현명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마키아벨리적 의미의 현명한 군주가 당시의 영국과 프랑스가 존재하지 않은 모양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국내외적 여건이 히틀러에 대한 예방전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음은 이미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다. 

헨리 키신저도 그의 저서 <외교>에서 1936년 히틀러의 라인란트 재무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서양민주주의가 다시한번 히틀러의 의도를 오해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외관상으로, 히틀러는 독일 영토를 다시 되찾은 것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그는 각종 연막 작전을 벌였다. 가령, 프랑스에 불가침 조약을 제안했다. 다시 한번 고개를 든 주장은 독일이 라인란트를 얻은 이상 이제 만족할 것이란 관측이었다. 주권 국가가 자신의 국경을 되찾는다는 것은 다른 유럽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지당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프랑스 지도자들은 독일에 대한 차별적인 조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국 시민들의 희생을 요구할 도덕적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독일이 아직 완전히 무장하지 않은 상태에서 히틀러를 상대하는 것이 차라리 더 도덕적인 것이 아닌가?

역사는 그 정답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대인들은 의혹에 사로잡혔다. 1936년에 히틀러는 자신의 정신병적 직관과 악마적 의지력을 독특하게 결합하여 재미를 보았다. 민주주의 국가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정상적인 사람을 상대하고 있다고 믿었다. 다소 지나친 면도 있지만, 국가의 지도자가 자신의 조국을 다른 유럽과 평등한 지위를 가지게 노력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것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속마음을 읽으려 노력했다. 그는 진지한가? 그는 진정으로 평화를 원하는가? 확실히, 이는 유효한 질문이었지만, 실제적인 힘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도에 대한 예측에 기초한 외교정책은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이다. 

적의 약점을 이용하는데 비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히틀러는 라인란트 재점령을 위한 적기를 잘 골랐다. 국제연맹은 에티오피아를 공격한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로 정신이 없는 상태였고, 또 하나의 다른 강대국과 대치상태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아비시니아 전쟁으로, 로카르노 조약의 당사국인 이탈리아와 서양 열강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영국은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하지도 않은 문제 때문에 이 문제로 전쟁에 말려들기를 원치 않았다.

키신저, 외교, 301-302쪽  



[전략] 몰트케가 비스마르크에게 한 말? Le monde


보불전쟁에서 대 몰트케 Moltke the elder 가 비스마르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단 전쟁이 시작된 이상, 정치가는 장군들이 승리를 안겨 줄 때까지 침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정치가들은 '닥치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일본 제국의 경우, 통수권 독립은 1889년의 메이지 헌법 11조에 명시되었고, 헌법에 따라 군대에 자율성이 부과되었다. 즉 통수권의 독립 Tosuiken no Dokuritsu 統帥權の獨立 은  민간의 감시로부터 군통수권을 독립시키면서 일본의 정부정책과 국가전략에 군부가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만들었다. 통수권 독립의 결과는, 사무엘 헌팅턴 Samuel Huntington의 지적처럼, 일본제국의 민군 관계에서의 "한결같은 무질서" 였다. 

이렇게 전쟁을 군대의 독점 영역이라고 주장한 두 나라 독일과 일본이 1945년에 동시에 패망한 것은 우연인가, 필연인가? 

전쟁과 관련해서, 문민정치가와 군대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정치가가 정치,정책을 담당한다면, 장군들은 전략을 책임진다고 할때, 정치와 전략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몰트케의 주장 처럼, 전쟁은 전략의 주체인 장군의 책임이기 때문에, 정치와 정책은 간섭해서는 안 될까? 

하지만, 프로이센과는 달리 프랑스에는 다른 철학이 존재한다. 제1차세계대전을 경험한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는 "전쟁이란 장군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한 문제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클레망소의 군사 보좌관 출신의 프랑스 장군 앙리 모르닥 Henri Mordacq 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와 전략간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을 주장했다. 장군들은 자신들이 만든 전략에 대해서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이는 전략이 국가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지를 검증받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물론 모르닥은 정부의 의무를 상기시키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정부는 장군들에게 정치적 목표를 제시하고, 장군들의 전략 수립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야 하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수립된 전략하에서 군대가 정부의 간섭없이 활동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몰트케를 이렇게 인용했다. "전략은 정치가 제시한 방향을 따라서 작동하지만, 동시에 전략이 자신의 행동 수단을 선택하는데는 완벽한 독립성을 가져야 한다."

클라우제비츠의 정의 처럼, "전쟁은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라 할 때, 정치가와 군인 그리고 정책과 전략의 조화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출처-

Hew Strachan, THE DIRECTION OF WAR -Contemporary Strategy in Historical Perspective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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