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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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리13구 | 2018/12/31 13:12 | 나의 즐거운 일기 | 트랙백 | 덧글(118)
케네디의 취임연설과 베트남 전쟁의 비극?
키신저의 경고...


1961년 1월 20일 케네디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다음을 주장했다.

"모든 나라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가 잘 되기를 빌든, 나쁘게 되기를 빌든 관계없이, 우리는 자유의 생존과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어떠한 대가도 치를 것이고, 어떠한 짐도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며, 어떠한 적과도 맞설 것입니다."

케네디의 위 연설 문안, 즉 미국이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전력을 다할 것이며, 적과 싸울 것이란 공약이 60년대 베트남이란 역사적 비극의 서문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유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역사적 사명이라는 이상주의적 믿음이 봉쇄정책이라는 미국정부의 정책이 되었고, 이 믿음에 따라, 베트남의 자유가 모스크바와 베이징이 지원하는 북베트남의 침략에 의해 위협당하게 되자, 
케네디와 린든 존슨의 미국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 베트남에 개입할 수 밖에 없었다.

피터 딕슨은 케네디 취임 연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유산은 그의 불시의 죽음 뿐만 아니라 그의 십자군적 정신이 미국의 해외 공약의 지나친 확장을 고무했기 때문에 거대한 의문 부호가 되었다." 1)

60년대 미국 역사에서 자유를 지키는 것이 미국의 사명이고, 이를 위해서 전 세계 어디에서든 공산주의 적과 싸우겠다는 십자군적 열정은 베트남 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으로 되돌아왔던 것이다. 

70년대초 닉슨과 키신저가 베트남 전쟁을 끝장내기 위해서 우선 비판해야 했던 것이 바로 이 반공주의의 십자군적 열정이었다.

미국은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베트남에서 싸웠지만, 정작 베트남에서 자유는 부재상태였다. 

1) Peter W. Dickson, Kissinger and the Meaning of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First Edition edition (October 31, 1978),p.145.
by 파리13구 | 2017/08/23 13:10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모택동의 인식변화?
키신저의 경고...



<호지명과 모택동>

북경대학의 양귀성에 따르면,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모택동의 인식은 4기로 구분된다.

인도차이나 전쟁에 대한 모택동의 인식은 4기의 변화를 거쳤다.

1기- 1949-1953년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동안 모택동은 프랑스에 대한 베트남의 저항을 지지했고, 타협에 반대했다. 모택동은 이데올로기 관점에서, 세계 혁명에서의 승리를 추구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무라고 주장했다.

2기- 1954-1957년 : 제네바 협정 이후 모택동은 평화와 민주주의를 주장했고, 베트남에서 무장투쟁 연기를 선호했다. 스탈린 사후 소련은 미국과의 평화공존 정책을 추진했다. 중국은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하면서, 국내 경제발전에 정책 우선 순위를 두었고, 이를 위해서 국제적 평화환경을 필요로 했다. 이 동안 모택동은 중국의 국제적 입장을 이데올로기 보다는 현실주의 관점에서 보았다.

3기- 1958-1969년 : 모택동은 북베트남의 반미 전쟁을 지지했고, 하노이와 워싱턴의 평화 회담에 반대했다. 모택동은 미국 제국주의와 소련 수정주의에 동시에 투쟁하고자 했다. 혁명성을 강조한 모택동은 베트남에서의 무장 투쟁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기- 1970-1973년 : 모택동은 북베트남과 미국의 평화회담을 지지했고, 베트남 전쟁의 종전을 지지했다.  1969년의 중소 국경분쟁으로 모택동은 중국의 안보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중국의 국제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해서 모택동은 소련에 맞서, 미국과 손을 잡으려 했다. 미국도 소련을 견제하고, 베트남 전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다.

1943-1973년까지 즉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발발부터 미중화해까지 모택동은 대체로 국가안보, 국내발전 그리고 중국 국내의 생활수준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인도차이나 혁명을 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이상주의가 지배적인 가운데에도, 모택동은 2기,4기에는 국가 안보, 국내 발전 이익도 챙기는 현실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Yang Kuisong, Changes in Mao Zedong's Attitude toward the Indochina War, 1949– 1973,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Working Paper 34,2002.41-43.
by 파리13구 | 2017/08/22 11:02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모택동과 영국 공산당의 대화, 폭력 혁명?
키신저의 경고...


1954년은 모택동 외교정책에서 화전양면 전술을 확인할 수 있는 해였다.

모택동의 중국은 54년의 한국과 인도차이나 분쟁 해결을 위한 제네바 회담에서 평화공존을 주장했고, 전쟁 지속을 주장하는 북베트남을 압박, 분단을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베트남 뿐만 아니라, 동남아에서 중국은 평화공세를 벌였다. 버마,태국,말레이시자 공산당에 대해서, 중국은 공산세력에 대한 지원 중단을 약속했고, 상호간의 체제 보장에 합의했다. 즉 중국은 동남아에 혁명을 수출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폭력 혁명 노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음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

1954년 제네바 협정을 즈음하여, 영국 공산당 서기장 해리 폴릿 harry pollitt 이 중국 공산당에 서한을 보냈다. 당 차원의 모택동 선집 2권의 번역과 관련하여, 영국 공산당은 다음 문장의 삭제를 요구했다. “혁명의 중심적 과업과 최고 형식은 무장 투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며,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폴릿은 이 문장이 자신의 당에 심각한 문제를 안길 수 있으며, 영국 공산당이 1951년에 채택한 당 강령에도 모순된다고 주장했다.영국 공산당은 러시아 볼셰비키가 혁명을 위해 사용한 폭력의 사용은 더 이상 영국 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결의했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 중국 공산당 선전부는 영국 공산당의 입장에 동의한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모택동이 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그는 공산당 선전부를 질책했다. 마오는 이후 외국 공산당 지도자들과의 대화에서, 이 사건을 자주 인용했다. 마오는 무장 투쟁을 통한 권력 장악은 중국 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적용되며, 과거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올바른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1)

평화공세 속에서도, 8월 11일에 주은래가 “대만은 해방되어야 한다”고 선언했고, 9월 3일 “제1차 타이완 해협 위기”를 도발한 것은 중국의 혁명성의 과시하는 것이자, 54년 중국 외교정책의 화전양면 전술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1) Yang Kuisong, Changes in Mao Zedong's Attitude toward the Indochina War, 1949– 1973, 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Working Paper 34,2002.p.15. 
by 파리13구 | 2017/08/21 14:54 | Le monde | 트랙백 | 덧글(0)
"중국 혁명과 소련 그리고 베트남"
키신저의 경고...



키신저는 모택동의 중국혁명 성공 이후, 소련-중국-베트남 3각외교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지금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내전에서 막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그들의 자존적 독립에 소련이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될 것으로 이미 생각하고 있었고, 또한 역사적으 로 베트남도 중국에 대해 똑같은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1950년대 인도차이나에서 공산주의가 성공했다면, 상기의 라이벌들 간의 경쟁이 더욱 가속화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것도 서양에게는 위협이 되었겠지만, 세계적 음모로 중심에서 기획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


1954년의 제네바 회담에서, 특히 5월 7일 디엔베엔푸에서 베트남이 승리한 이후,북베트남의 입장이 강경해졌다. 베트남의 강경한 입장을 잠재우고, 타협을 통한 협상 타결을 압박한 것이 바로 모택동과 주은래였다. 중국은 전쟁의 지속을 통한 무력 통일 보다는 북위 17도 선을 기준으로 한 분단을 수용하라고 북측을 압박했다.

당시의 중월관계의 불신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1954년 7월 22일 제네바 회의 참가자들을 위한 만찬이 열렸는데, 만찬 도중 중국 대표였던 주은래 수상은 회의에 참석한 베트남 남쪽의 총수 고 딘 디엠(Ngo Dihn Diem)의 동생에게 북경에 사이공 측의 공사관을 여는 것이 어떠나는 놀란 만한 제안을 한다. 협정이 체결 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중국이 벌써 특유의 양다리 외교를 시작한 것이다. 사이공 측의 거부로 제안이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월맹은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 베트남을 영구 분단시키려는 중국의 의도에 대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다.

1) Kissinger, Diplomacy ( New York: Simon & Schuster, 1994), 627.

2) 김기수, 중국 도대체 왜 이러나,살림,2010 

by 파리13구 | 2017/08/21 12:54 | Le monde | 트랙백 | 덧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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