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및 방명록 - 2판... 나의 즐거운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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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무쓰,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면 안 된다.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1894년 8월 7일

일본 외상 무쓰 무네미쓰, 이토 히로부미에 보고서,

"한국에 군대를 파견할 때 일본의 목적은 한국 주권의 침해가 아니라, 부패의 개혁이었다. 이는 고위급 회담에서 결정되었고, 이 목적은 타국 정부에게 명시적으로 설명되었다. 
하지만 7월 23일 이래, 편의상, 조선군의 무기가 압수되었고, 조선 경찰의 힘도 제한되었다. 사실상, 나라의 주권이 침해당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오래 계속된다면, 우리는 다른 강대국들의 의심을 사게 된다. 특히 러시아.  이것이 개입의 빌미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명확히, 조선은 우리의 동맹이며, 우리는 조선 정부에 무기를 돌려 줄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군대 훈련을 위해서 일본 장교들을 제공해야 하며, 그들이 자신의 독립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렇게 한국 민중들에 대해 중립적이며 이기적이지 않은 의도를 보여야 하며, 다른 열강 앞에서 우리 행동을 옹호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물론, 현재 우리는 중국과 전쟁 중이며, 따라서 평화일 때처럼 행동할 수 없다. 하지만 조선 독립의 명예를 유지하고, 한국인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급한 일이다. 
제발 이 점을 각의에서 토론하기를 바라며, 나는 오토리 공사에게 훈령할 예정이다."

각의에서 무쓰의 제안이 수용되었다.  오토리 공사에 대한 훈령에서 무쓰는 "국제법에 저촉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며, 조선은 적이 아닌 동맹국이다. 일본군의 이동은 조선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무쓰에 따르면, 조선을 신중히 대접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이 다른 강대국에게 불만을 제기할 것이며, 이것이 열강의 분쟁 개입의 빌미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미 러시아 정부가 개입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 무쓰의 시각이었다.

출처-

Hilary Conroy, The Japanese Seizure of Korea: 1868-1910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1960), 264-265.


1892년,일본의 대한정책의 두 가지 경향은?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1892년의 시점에서 일본의 대-한국 정책은 두 개의 주장의 갈등이었다.

1892년 오이시 마사미가 주한 일본 공사로 부임했다. 주한 미국공사 허드 Heard가 오이시의 부임에 대해서 본국에 이렇게 보고했다.

- 주한 미국공사 허드 Heard 의 관련 보고, 일본에서의 대한 정책의 두 경향에 대해서,

“일본에는 항상 두 개의 파벌이 존재해 왔다. 이홍장-이토 협정으로 대표되는 중국과의 평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하나이며, 지금까지 정부가 추진해 온 것이 그것이었다면, 정부 정책에 반대하여 (조선의) 독립을 선호하는 정책이 존재하며, 적극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것이 다른 하나이다. 후자가 힘을 얻고 있으며, 신임 주한 일본 공사 오이시 마사미는 바로 이를 위해 파견되었다고 한다.” 

Hilary Conroy, The Japanese Seizure of Korea: 1868-1910, 207.
   

- 말하자면,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의 화해 정책이 무쓰 미네미쓰- 오이시 마사미의 대결 정책이 갈등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1892년 이후 청일전쟁에 이르기까지

후자가 전자를 앞도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노기 마레스케, 이토 히로부미의 죽음에 대해...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큰 소리로 말할 수 없지만,

실로 죽을 장소를 잘 얻은 사람이다."

-노기 마레스케

이토의 국장 당시 그의 관 옆에서

출처-

나카무라 기쿠오, 이등박문 중에서...


1880년대 조선에서의 반중주의 反中... Le monde

[1894년] 영국의 더 타임스의 한마디...


김정기에 따르면, 1880년대 조선에서 반중의식이 만연했다고 한다.

[반중의식] 

1880년대, 1890년대 사료의 바다에 그물을 드리우면, 아무 곳에서나 걸려드는게 반청 자료이며, 청의 속방화 屬邦化 정책은 추진 초기부터 그 추진현장에서 예외없이 민의 반중(반청)의식을 촉발하는 매체로 작동하고 있었다. 가령, 청국 군대의 남양만 상륙 때의 행패와 대원군 납치가 그 대표 사례였다. 특히 1885년 이후 확산된 청상인의 침투는 민의 저항을 불러왔다.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동학농민혁명의 동아시아사적 의미, 서경, 2002, 37.

- 당시 조선에 상주했던 원세개는 고종을 마치 부하처럼 다루는 갑질을 일삼았다.

- 오늘날 한국에서 통용되는 중국인 비하표현 "짱깨"라는 말의 기원이 바로 이 때가 아니었나 추정된다.

짱깨는 중국어로 "장꾸이", 즉 사장을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에 중국 사람이 조선으로 와서, 사장 행세를 하는 것은 중국요리집 밖에 없으므로,

짱깨는 처음 조선에 와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중국요리집 사장을 부르는 말이 었다가, 이것이 지금은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 근대 한국인의 반중의식은 1931년 7월의 만보산 사건과 이에 따른 한국에서의 중국 배척운동에서 확인되었다.

만보산 사건이란, 

 1931년 7월 2일에 중국 만주 지린 성 창춘 현 싼싱바오(三姓堡)에 있는 만보산 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한국인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로 일어난 충돌 및 유혈사태였다. 

만보산 사건 소식이 전파되자, 
  
인천을 필두로 경성·원산·평양·부산·대전·천안 각지에서 수천 명이 참가하는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평양과 부산과 천안에서는 대낮에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학살하는 사건이 며칠간 계속되는 등 잔인한 폭력사태로 확산되었다. 일제는 조작된 기사를 보도하게 하였고, 부산과 천안에서 불량배를 매수하여 폭력행위를 조장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동아일보》 등의 오보임을 알리고 진정을 호소하는 보도로 7월 10일 이후로 진정되었으며, 이후로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수가 급감하였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화교 활동이 가장 미약한 나라가 된 것은 개항기의 반중주의와 관련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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